4부 마른 세례
18화. 오자 뒤의 이름과 겨울 바람완결
캐리어 지퍼가 반쯤 열린 채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스물넷의 살림이 거기 다 들어갔다. 계절마다 껴입던 옷 몇 벌, 밑줄이 그어진 성경책,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챙겨 온 컵라면 두어 개. 그 옆에 종이백이 문을 향해 반듯하게 서 있었고, 안에는 리넨 셔츠가 접힌 채였다.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는 것도 정산의 일종이었고, 아직 그런 회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복도 쪽에서 락스 냄새가 문틈으로 밀려들었다. 관리인 아저씨가 물걸레질을 하는 소리가 났고, 곧 문을 두드리는 대신 문틈에 대고 물었다.
“오늘 나가는 거 맞지?”
“네. 다 정리됐어요.”
내 목소리가 좁은 방 안에서 낮게 울렸다. 벽지의 못 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제까지 걸려 있던 회색 티셔츠도 이제 캐리어 안에 개켜 있었고, 못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누런 물자국 위에 박혀 있었다. 이 방에 이년을 살면서 저 못에 무엇을 걸었는지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수건이었고, 그다음엔 교회 봉사용 앞치마였고, 지난가을엔 백화점에서 산 리넨 셔츠였다. 못은 하나였는데 거기 걸린 것들의 값은 매번 달랐다.
짐을 마지막으로 눌러 담다가 성경책 갈피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손끝에 걸렸다. 펴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았다. 스무 살에 받은 세례 증서였다. 로마서 6장의 물속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산다던 그날, 목사님이 내 이마에 물을 찍어 발랐고, 며칠 뒤 이 종이가 손에 쥐여졌다. 김도헌. 인쇄소는 내 이름의 가운데 획 하나를 흘렸고, 나는 사년째 그 오자 뒤에서 살았다. 정정을 신청하지 않은 건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정결했던 사람의 이름이 나와 조금 다르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편했던 것이다.
나는 종이를 든 채 휴대폰을 집었다. 교회 사무실 번호가 통화 목록 위쪽에 남아 있었다. 이사 신청서에 오자 없이 이름을 적어 낸 게 며칠 전이었으니, 내친김에 증서도 고쳐 달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손가락이 번호 위에 얹혔다. 재발급이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면 김도헌은 사라지고, 정결한 김도현이 종이 위에 새로 인쇄되어 돌아올 것이었다.
손가락은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정결했던 김도헌은 스무 살의 그 물속에, 이 종이 속에 살게 두기로 했다. 오자 뒤에 숨어 정결을 빌려 입던 사람은 거기 두고, 나는 획이 온전한 내 이름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종이를 다시 성경책 갈피에 끼워 넣으면서 나는 이것이 용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도 나를 씻겨 주지 않았고, 씻어야 할 것은 애초에 물로 지워지는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재발급된 종이 한 장으로 지난여름의 수요일들이 인쇄되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관리인 아저씨에게 열쇠를 반납하고 나는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내려왔다. 지하철역은 두 정거장 거리였다. 개찰구 앞까지 갔다가, 나는 계단을 도로 올라와 한강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록의 이음매마다 덜컹거렸고, 종이백이 어깨에서 자꾸 흘러내렸다.
다리 위 인도로 올라서자 바람이 옆에서 정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초겨울 강바람이 뺨을 때렸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강 저편, 언덕 위 어딘가에 그 복층 빌라가 있을 것이었다. 지금쯤 그 집 스피커에서는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가 명품 식기 위로 흐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전의 나라면 벌써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접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수요일까지 며칠.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그 셈이 반사적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이번에는 손끝에 닿기 전에 흩어졌다. 주머니 속 손가락은 접히지 않은 채 펴져 있었다.
국밥을 사 주던 날 재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요즘 얼굴이 좀 폈다.”
나는 그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폈다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여름내 손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던 미끈함이 조금 마른 얼굴, 그것을 재영은 그렇게 불렀는지도 몰랐다.
다리 중간쯤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손을 씻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았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편의점 현금을 만질 때도 그녀의 봉투를 만질 때도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가 물을 틀었다. 지금 이 쇳덩이의 냉기는 그 어떤 세제보다 정직했고, 씻어 낼 것도 없었다.
강물은 무겁게 흘렀다. 첫날 그 식탁 위에서 광택을 뿜던 은수저를 나는 잠깐 떠올렸다. 강 저편 어딘가에 그 한 벌이 여전히 조리대에 나란히 놓여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제자리에 두고 왔고, 대신 이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다리 아래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잠깐 찬송가 한 소절처럼 귀를 스쳤지만, 곧 그냥 바람이었다.
나는 그 바람을 얼굴로 정면에서 받았다. 이것은 세례가 아니었다. 나를 정결하게 만드는 물이 아니라, 그저 뺨을 시리게 하는 겨울 공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차가움을 피하지 않고 오래 서 있었다. 강 건너에 두고 온 여자를, 두고 온 이름을, 두고 온 온기를 나는 용서하지 못했고 용서받지도 못했다. 다만 그 값이 얼마였는지, 그것을 판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만은 이제 내 이름으로 지고 갈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바퀴가 다리 이음새를 넘을 때마다 덜컹, 하고 몸 전체가 흔들렸다. 종이백 속의 셔츠는 여전히 그 안에서 반듯하게 접혀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할지는 여전히 정하지 않은 채였다. 강물은 발밑에서 계속 흘렀고, 나는 반대편 강기슭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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