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마른 세례
17화. 첫서리 내린 손끝
열한 시가 넘으면 종로의 밤은 온장고 소리만 남는다.
붕붕거리는 그 소리와 캔커피 진열대 위로 흐르는 라디오, 그리고 내 손끝의 삼각김밥. 나는 유통기한 스티커를 손톱으로 확인하며 지난 것들을 폐기 바구니에 던져 넣고 있었다. 참치마요 하나가 삼각의 각을 세운 채 바구니 안에서 미끄러졌다. 그때 통유리 너머,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섰다.
강 장로의 차였다. 매장 앞 아스팔트 위에 늘 원목 냄새를 밴 것처럼 세워져 있던, 그 차. 나는 김밥을 쥔 손을 바구니 위에 그대로 멈췄다. 계산대 뒤에서 유리 두 겹을 사이에 두고, 붕붕거리는 온장고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조수석 창은 아래쪽 절반이 서리로 흐려져 있었다. 그 위로 실내등도 없이, 가로등 불빛만 비껴 들어간 옆얼굴이 앉아 있었다. 파운데이션으로 덮어도 알아볼 수 있는 목덜미의 선. 수요일마다 찬송가 볼륨을 올리고 나서야 내 뒤로 흘러내리던 그 손이 붙어 있던 목이었다. 수연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리 위쪽, 흐려지지 않은 유리에 그녀의 눈이 걸렸다. 나를 본 것 같기도 했고, 편의점 간판의 불빛만 훑고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몇 초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니 지지난 달의 나였다면, 그 몇 초 안에 벌써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다음 수요일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그 셈을 눈보다 먼저 시작하는 손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세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은 김밥의 각을 쥔 채 그대로였고, 머릿속에서 날짜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유리 두 겹, 편의점 통유리와 그녀의 서리 낀 차창 사이의 거리가, 내가 여름 내내 접었다 폈다 하던 이레보다 훨씬 멀다는 것만 실감했다. 그 거리는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는 정지선을 넘어 왼쪽으로 미끄러지듯 빠졌다. 서리 낀 조수석은 곧 다른 차들의 헤드라이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봤는지 아닌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봤다면 봤고 못 봤으면 못 본 것이지, 거기에 내가 맞춰야 할 다음 일정이 없었다.
출입문 벨이 울렸다. 넥타이를 헐겁게 푼 회사원 하나가 들어와 컵라면과 초록병 소주를 계산대에 올렸다.
“봉투 하나요.”
나는 검은 비닐봉투를 펼쳐 컵라면을 먼저 넣고 소주를 뉘어 담았다. 봉투의 비닐이 손끝에서 서걱거렸다. 그 감촉이 낯설어서 잠깐 멈칫했다. 여름 내내 내 손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것은 이런 서걱거림이 아니었다. 흰 봉투 안에서 꺼낸 지폐의 그 미끈함,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종잇장의 기름기 같은 것. 검은 봉투는 그냥 검은 봉투였다.
“삼천이백 원이요.”
카드가 단말기를 긁고 지나갔다. 회사원이 봉투를 들고 나가고 벨이 다시 울린 뒤, 나는 계산대 위로 손등을 들어 올려 형광등 아래에 대 보았다. 손을 씻고 싶다는 충동이 오지 않았다. 그 충동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이상해서, 나는 세례식 화장실에서, 호프집 세면대에서 몇 번이고 물을 틀던 손을 지금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등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물자국도, 기름기도, 셈도.
새벽 두 시에 근무를 넘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복도 형광등은 여전히 하나가 나가 있었고, 공용 주방에서는 누가 끓이다 만 라면 냄새가 얕게 고여 있었다. 열쇠를 두 번 돌려 문을 밀자, 누런 물자국이 번진 벽지 위에서 아이보리색 리넨 셔츠만 물기 없이 멀쩡하게 걸려 있었다. 못 하나에 옷걸이째 걸린 그것은 이 방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벽지와도, 장판과도, 접힌 이불과도.
나는 불도 켜지 않고 그 앞에 앉아 오래 그것을 봤다. 저 옷을 저 자리에 걸어두면, 매번 방에 들어설 때마다 그 집 천장의 크리스털이 떠올랐다. 그 조각들을 세며 견디던 수요일들이, 셔츠의 옷깃을 따라 이 방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옷걸이째 벽에서 내렸다. 리넨은 손안에서 가벼웠다. 백화점 거울 앞에서 수연이 “이제 우리 교회 청년 같네” 하고 웃던 그 무게가 이 얇은 천 어디에 들었던 것인지, 접는 동안에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반듯하게 접어 문 옆에 세워둔 종이백 안으로 넣었다. 종이백 안에는 여름밤의 근무 냄새가 배도록 오래 처박아 둔 낡은 티셔츠가 있었다. 나는 그 티셔츠를 꺼내 못 자리에 대신 걸었다. 목이 늘어난 회색 면이 벽지의 누런 자국 위에서 축 처졌다. 그것은 이 방과 닮아 있었다.
버릴 것인지 입을 것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다만 종이백 안에 접어 넣는 것과 못에 걸어두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언젠가 재영이 새 셔츠를 알아보며 옷이 사람을 바꾸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이 반쯤 틀렸다고 생각했다. 옷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옷을 어디에 걸어두느냐를 겨우 정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내 몫이었다.
불을 껐다. 창틀 아래로 첫서리 내린 새벽의 냉기가 얇게 스며들었다. 그것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며칠 뒤가 무슨 날인지 세지 않았다. 손가락은 이불 안에서 접히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종이백 안의 셔츠는 아직 문 옆에 서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할지는 내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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