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층의 찬송16화 / 전 18화7

4부 마른 세례

16화. 수저와 국물이 가라앉는 시간

김도현


사무실 문에 손을 대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그 며칠 동안 나는 편의점 야간을 채우고 낮에는 방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봤다. 벽지 못 자리에는 아이보리색 셔츠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 나는 그것을 내리지도 다시 입지도 않았다.

문을 밀자 토너 냄새가 먼저 났다. 복사기가 종일 돌아간 방 특유의, 마른 잉크와 뜨거운 종이 냄새. 그 아래로 오래된 커피포트가 바닥에 눌어붙힌 커피 냄새가 깔려 있었다. 간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교적 이전 신청서요. 어디서 받나요.”

그제야 그녀가 나를 봤다. 얼굴을 아는 눈치였다. 청년부 봉사 명단에서, 주보 봉사자 칸에서 여러 번 마주쳤을 이름. 그녀는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이유란을 손끝으로 짚었다.

“여기, 사유 적으시면 돼요.”

볼펜을 쥐고 나는 잠깐 멈췄다. 이 칸에 들어갈 말을 나는 언덕을 내려오면서 이미 정해두었는데, 막상 펜 끝을 종이에 대자 그 말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이사. 나는 그렇게 적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옮겨가는 이사인지, 무엇에서 무엇으로 건너가는 것인지는 그 여덟 글자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교회로 가세요.”

“아직 안 정했어요.”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종이 위쪽을 짚었다. 이름 쓰는 칸이었다. 나는 볼펜을 다시 눌렀다. 김도현. 획을 하나하나 눌러 썼다. 현. ㅎ과 ㅕ과 ㄴ을, 나는 스무 살에 받아 성경책 갈피에 접어둔 그 증서의 김도헌이 아니라, 이번에는 내 손으로 오자 없이 적었다. 획 하나 바꾸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싶었다. 볼펜을 내려놓고서야, 나는 그 종이 속 잘못 인쇄된 이름을 그동안 한 번도 고쳐달라 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결하다고 믿었던 쪽을 종이에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이쪽의 나를 그 이름 뒤에 숨길 수 있으니까.

간사가 신청서를 받아 스테이플러로 어딘가에 물렸다. 짧고 둔한 소리가 났다. 그걸로 끝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재영이 서 있었다. 청년부 회의 자료 뭉치를 한쪽 팔로 안고, 다른 손에는 프린트가 덜 나온 종이 몇 장을 들고서. 나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는 복도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적 뺐어?”

그가 먼저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재영은 로마서 성경 공부가 어떻게 됐냐고 묻지 않았다. 지하 호프집에서 내가 청년들 몇과 로마서를 읽는다고 둘러댔던 그 거짓말을, 그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안 물을게, 라고 말했던 그날의 약속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아팠다. 차라리 캐물으면 나는 또 문장 순서를 계산해가며 매끄럽게 넘겼을 텐데, 그는 나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재영아.”

목이 잠겨 있었다.

“나, 잘못한 게 있어.”

거기까지가 내가 꺼낼 수 있는 전부였다. 무엇을, 누구와, 얼마를 받고. 그 뒤는 혀 위에서 굳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반쪽짜리 문장을 복도에 세워둔 채 그를 봤다.

재영은 자료를 고쳐 안았다. 나를 잠깐 보더니, 뭘 잘못했냐고도, 그럴 줄 알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밥 먹었냐.”

교회 뒷골목 국밥집은 점심때가 지나 손님이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텔레비전을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주방에서 뭔가를 다듬고 있었고, 뉴스 앵커의 목소리와 뚝배기 끓는 소리가 뒤섞였다. 재영이 두 그릇을 시켰다. 우리는 마주 앉았다.

뚝배기가 나왔다. 국물이 가장자리로 넘칠 듯 끓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재영은 말없이 깍두기 접시를 들어 그 국물을 내 밥그릇 쪽으로 조금 밀어 넣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 하는 종류의, 묻지 않고 하는 손짓이었다.

숟가락을 들다가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은빛이 눈에 걸렸다. 한남동 조리대에 나란히 놓여 있던 그 수저, 영국제라던, 내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던 그것이 겹쳐졌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그저 스테인리스였다. 무게도 광택도 다른, 값을 물을 일 없는 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수저에는 아무 셈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나 다 알아.”

재영이 국물을 한 술 뜨고 말했다.

“안 물을게.”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밥만 떴다.

“근데 말한 거, 그거 하나는 잘했어.”

그가 고개를 들지 않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낮게.

“얼굴 아직 상했다.”

나는 국밥 위로 김이 오르는 것을 봤다. 고백이 나를 씻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세례받던 날의 물도 나를 씻지 못했는데, 뒷골목 국밥집에서 친구에게 반 토막 내뱉은 문장 따위가 무엇을 지우겠는가. 용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재영은 용서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나도 그것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런데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오래 조여 있던 어딘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두 달 넘게 나는 숨을 절반씩만 쉬고 있었던 것 같다. 수요일까지 며칠 남았는지 손가락을 접던 그 시간 내내.

밥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재영이 먼저 일어났다. 나도 지갑을 꺼내려고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계산대 앞에서 그가 손등으로 내 팔을 막았다.

“됐어. 이번엔 내가.”

나는 그 손을 뿌리치려다 말았다. 흰 봉투 속의 돈으로 월세를 냈던 손, 헌금함에 지폐 한 장을 정산하듯 얹던 손이 나에게는 있었다. 값을 치르는 일이라면 나는 늘 뒤가 켕겼다. 누가 나를 사는지, 내가 무엇을 파는지 셈하느라 그랬다. 그런데 재영이 국밥 두 그릇 값을 카드로 긁는 몇 초 동안,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 나 대신 값을 치르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여기에는 뒷면에 적힌 주소도, 냉장고 달력의 붉은 표시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골목 끝에서 바람이 들이쳤다. 재영은 회의 자료를 다시 고쳐 안고 교회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 나는 반대편으로 걸었다. 손가락은 접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무엇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세지 않았다.

다만 방으로 돌아가면 못 자리에 걸린 셔츠를 어떻게 할지, 그것만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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