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마른 세례
15화. 은수저를 놓는 자리
물소리가 벽 너머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샤워기 아래에서 물이 타일을 때리고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 그 사이사이 그녀가 몸을 돌리는 기척. 나는 조리대 앞에 서서 그 리듬을 들었다. 거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찬송가가 흘렀고, 은수저 두 벌이 스탠드 조명을 되받아 흰빛을 조리대 위에 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벌을 집었다. 첫날 밤, 새벽에 언덕을 내려가기 전 만지작거리다 놓았던 그 물건이었다. 영국제라고 그녀가 지나가듯 말했던, 손잡이 끝에 이니셜이 얕게 새겨진 스푼과 나이프. 금속의 서늘함이 손바닥을 지나 바지 주머니 안쪽에서 허벅지에 닿았다. 나는 손끝을 바지에 문질렀다. 물비린내와는 다른, 씻어도 남는 미끈함이 여전히 손가락 마디에 얹혀 있었다.
현관까지 걸어가는 데는 몇 걸음이 걸리지 않았다. 도어록 숫자판이 어둠 속에서 옅게 빛났다. 강 장로 부부의 결혼기념일. 내가 매주 눌러 이 집으로 들어온 네 자리. 나는 문고리를 쥐었다. 놋쇠보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서 데워지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나가면 무언가가 정리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손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월세의 두 배가 들어 있던 흰 봉투, 엄지로 눌러 덮은 가격표의 숫자, 봉투도 없이 헌금함에 얹었던 지폐 한 장. 나는 늘 무언가를 손에 쥐거나 어딘가에 얹으면 죄가 셈으로 옮겨간다고 여겨온 사람이었다. 이 스푼도 그 장부의 한 줄일 것이었다. 여름 내내 내가 받아먹은 것들에 대한, 뒤늦게 내가 걷어가는 대가.
그런데 문고리를 쥔 채로 나는 알아버렸다. 이 은수저는 그녀가 내게 물린 값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걸 가져가라고 한 적이 없었다. 봉투를 넣고, 셔츠를 입히고, 침대 위로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녀였지만, 그 값을 물건으로 환산해 회수하겠다고 부른 쪽은 나였다. 나는 팔린 게 아니었다. 값을 부른 쪽이 나였다. 그 문장이 배 속으로 차게 떨어졌다.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주머니에서 스푼과 나이프를 꺼냈다. 손잡이 끝이 서로 부딪히며 얕은 소리를 냈고,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감싼 채 조리대로 돌아왔다. 원래 놓여 있던 자리, 조명이 정확히 그 위에 떨어지던 자리에 두 벌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놓고 나서도 손가락은 한동안 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실 스피커로 걸어가 나는 찬송가를 껐다.
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그제야 물소리가 언제부터인가 멎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후렴을 반쯤 넘어가던 노래가 사라진 자리로, 이 집이 원래 가지고 있던 침묵이 밀려들었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창밖 언덕 아래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여름 내내 이 집에서 이렇게 조용한 순간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가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볼륨부터 올렸으니까.
거실 문턱에 수연이 서 있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목선을 타고 어깨로 떨어지는 채였다. 가운 끈을 다 여미지도 못한 손이 허공에 어중간하게 멈춰 있었다. 그녀는 늘 웃으면서 결정적인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성경 구절과 브랜드 이름을 같은 억양으로 발음하던 입이었다. 그런데 그 입이 이번엔 열렸다 닫혔다.
“……도현아.”
내 이름 뒤에 붙일 문장을, 그녀는 찾지 못했다. 그 짧은 부름과 뒤이은 침묵이, 지난 여름 우리가 서로에게 매끄럽게 팔았던 모든 대사보다 정직했다. 나는 그녀의 젖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화장을 지운 얼굴, 스탠드 불빛 아래 눈가에 잔주름이 도드라진 서른여섯의 얼굴.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비 내리던 밤 그녀가 들려준 반지하 창틀의 여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신문지를 끼우고 장학금으로 버티다 결혼으로 강을 건넜다던 그 여자를.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 여자에게서 옛 나를, 아니 곧 닥칠 내 얼굴을 알아보고도 값을 불러버린 나였다. 위선이 역겹다고 소리쳤던 며칠 전의 나였다. 역겨운 건 그녀의 위선이 아니라, 그 위선의 온기 아래로 매주 손가락을 접으며 기어들던 나였다.
“수저, 원래 자리에 뒀어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는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조리대 쪽으로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문턱에 선 채로 나를 보았고, 나는 신발을 신었다. 굽을 구겨 신지 않으려 발뒤꿈치를 손가락으로 밀어 넣는 그 짧은 동안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어록이 열리는 전자음이 조용한 집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손가락을 접지 않았다. 여름부터 몸에 밴 그 셈, 다음 수요일까지 며칠인가를 하루 이틀 사흘 헤아리던 그 습관이 이번엔 시작되지 않았다. 손은 그냥 옆구리에 있었다. 나는 그 대신 고시원 성경책 갈피에 접어둔 세례 증서를 떠올렸다. 스무 살에 받은, 이름 자리에 김도현이 아니라 김도헌이라고 잘못 찍혀 나온 그 종이. 오자를 고쳐 달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름.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이제야 내 것 같았다. 정결하다고 스스로 믿었던 김도현은 애초에 그 증서 속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잘못 인쇄된 채로 접혀 있던 김도헌, 처음부터 어딘가 어긋난 이름이 실은 나였다.
밤공기가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백화점에서 입혀준 아이보리색 리넨.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소맷단이 서걱거렸다. 나는 그 감촉을 지웠던 손, 매장에서 태그의 숫자를 엄지로 덮던 손을 이번엔 쓰지 않았다. 값이 얼마였는지 나는 여전히 몰랐고,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 옷을 걸친 채로 언덕을 다 내려왔다. 아래쪽 큰길에 가로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그 밑으로 택시 몇 대가 빈 채로 지나갔다. 나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었다. 뒤에서 복층 창의 불이 켜졌는지 꺼졌는지, 이번에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