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층의 찬송14화 / 전 18화7

3부 금이 간 잔

14화. 은수저와 젖은 손가락

김도현


“왔어?”

수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부엌 조리대 앞에 서서 은수저를 닦고 있었고, 마른행주가 수저 목을 감아쥐었다 놓을 때마다 물기가 벗겨지고 광택이 올라왔다. 두 벌이었다. 첫날 식탁에 놓여 있던 그 영국제 한 벌. 나는 도어록에 눌러 넣은 네 자리를 손끝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채로 현관에 서 있었다.

문장은 언덕을 오르는 내내 외웠다. 끝내겠다는 말을 먼저, 다시 오지 않겠다는 말을 그다음. 두 문장 사이에 무릎이 꺾이지 않도록 순서를 붙들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냄새가 먼저 왔다. 나무 태운 것 같기도 하고 마른 꽃 같기도 한 디퓨저, 그 아래 깔린 그녀의 살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낮게 흐르는 찬송가. 볼륨은 늘 관계 직전에 올라갔는데 오늘은 벌써 방 안 어딘가에서 후렴이 돌고 있었다. 준비한 첫 문장이 목 안에서 젖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수연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순서를 안다.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고 눈이 나중에 접히는, 결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짓는 얼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내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수요일마다 나를 무너뜨리던 그 자리, 손이 얹히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그 지점을 그녀는 정확히 눌렀다.

몸이 먼저 응했다. 말은 그 뒤에서 길을 잃었다.

침대에서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명 아래 크리스털 조각들이 저마다 다른 각도로 빛을 쪼개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세다 보면 지금 이 자리가 잠깐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나는 매번 그것들을 셌다. 오늘은 끝이 없었다. 응하는 몸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한 몸 안에서 같이 헐떡였고, 나는 끝내러 온 밤에도 그 온기에서 밀려나지 못했다. 밀려나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밀어낼 힘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다.

끝나고 나서야 말이 터졌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본 채였다.

“당신 위선이 역겨워요.”

숨이 아직 고르지 않았다.

“성찬처럼 굴잖아요. 찬송가 틀어놓고, 은수저 닦아놓고, 이러는 거. 주일마다 대표 기도 하고 와서 이러는 거.”

수연은 담배도 없이 손끝만 까딱였다. 이불 위에서 손가락 하나가 위아래로 작게 흔들렸고, 나는 그 움직임을 곁눈으로 봤다. 그녀가 낮게 웃었다.

“역겹다면서.”

말끝이 늘어졌다.

“왜 매주 그 번호를 눌러.”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문장이 없었다.

“도현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자 없는 이름을, 세례 증서에는 없던 이름을.

“그 위선 덕에 네 월세가 나갔잖아.”

그녀는 결정적인 말을 웃으면서 하는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웃었다. 이 사이로 바람이 새는 소리 없이, 그냥 편안하게. 반박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안에서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로마서 갈피에 봉투를 끼워 넣던 밤이 떠올랐다. 절반을 주인 남자 손에 세어 주던 밤. 그리고 그전에, 남은 액수를 방바닥에 쭈그려 앉아 계산하던 나. 어릴 때부터 나는 숫자를 쓸 때 위와 아래를 나눠 눌러 썼다. 8을 쓸 때는 특히 그랬다. 위 원을 그리고 멈췄다가 아래 원을 또박또박 붙였다. 그 밤에도 손은 저 혼자 그렇게 움직였다. 타락한 액수를 정산 가능한 숫자로 바꾸면서, 나는 내가 회계원처럼 침착하다는 게 무서웠다.

그녀가 틀리지 않아서 나는 아무 말도 되받을 수 없었다. 그게 치욕이었다. 그녀가 나를 판 게 아니었다. 값을 매겨 판 것은 나였고, 나는 그 거래에 서명한 손으로 지금 이불을 쥐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어둠 속에서 은수저처럼 반짝였다.

“물 좀 마실게요.”

겨우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엌으로 갔다. 정수기 앞에 서서 유리컵에 물을 받았다. 세례받던 날 목사가 이마에 부어주던 물, 그날 목을 넘어가던 그 물의 온도를 나는 이 부엌에서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고, 수도를 틀어 손을 씻었다. 비누도 없이 손바닥을 문질렀다. 손끝의 미끈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물을 대고 있어도 그 감각은 피부 아래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물이 차가워서 그런 거라고, 재영에게 했던 핑계를 나는 이 부엌에서 혼자 다시 중얼거렸다.

수도를 잠그고 고개를 들었을 때 냉장고 문에 붙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주 어느 칸에 붉은 동그라미가 하나 그어져 있었다. 강 장로의 부재를 표시하는 표식. 그가 없는 날이 곧 내가 이 언덕을 오르는 날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늘부터 손가락을 접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레였다.

끝내러 온 밤이었다. 다시 오지 않겠다는 문장을 언덕에서 그렇게 외우고 올라온 밤이었다. 그런데 젖은 손끝은 벌써 다음 수요일을 세고 있었다. 나는 접힌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여태 증오한 것이 그녀의 위선이 아니었다는 걸 그제야 인정했다. 나는 그 위선에 매겨진 내 값을, 그 값을 순순히 받아 쥔 내 손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증오하면서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거실 스피커에서는 아직 찬송가가 흐르고 있었다. 침실 쪽에서 그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컵을 조리대에 그대로 두었다. 두 벌의 은수저가 그 옆에서 물기 없이 마르고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