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빈손의 아침
33화. 흰빛이 고이는 시간완결
조끼에서 컵라면 국물 냄새가 났다. 밤새 카운터에 밴 냄새가 옷섬유 사이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벗어 문고리에 걸었다. 방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서늘했고, 냉장고 도는 소리만 발밑으로 낮게 깔렸다.
삼각김밥 하나를 손에 쥔 채 식탁에 앉았다. 데우지 않았다. 참치마요, 세훈이 데워 먹는 법을 알려준 것과 같은 종류였다. 비닐을 뜯다 말고 그냥 옆에 내려놓았다. 창으로 아침빛이 비스듬히 밀려 들어와 상 위에 길게 누웠다. 밖에서 누군가의 구두 굽이 또각또각 지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화면부터 켰을 것이다. 앞자리가 몇인지, 붉은지 검은지. 그 숫자 하나로 하루의 무게를 재고 나서야 눈을 붙였다. 지금은 켤 화면도, 셀 앞자리도 없었다. 대신 나는 노트를 폈다. 삼천 원짜리, 표지가 벌써 한쪽으로 휜 것.
세훈의 이름이 있었다. 김씨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 손으로 그린 사각형 두 개, 맡긴 옷과 찾을 날짜. 아저씨 손가락이 두꺼우니까 버튼은 크게. 페이지를 넘기자 아무것도 없는 흰 장이 나왔다.
빛이 그 위로 고였다.
나는 볼펜을 쥐었다. 무언가를 얼른 적어 넣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목까지 올라왔다. 흰 장이 비어 있는 걸 오래 보고 있으면, 그게 나를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채워야 한다. 우상향으로 뭔가를 그려 넣어야 한다. 손이 저 혼자 움직이려 했다.
볼펜을 다시 내려놓았다.
세훈이 했던 말이 손을 눌러 앉혔다. 다른 사람 노트엔 좋은 기억이 적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것도 적어요. 그애는 폐기 도시락을 데우는 법을 알려주면서, 자기가 해고당하던 날 내가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하루를 인건비 절감액으로만 적어 두었는데, 같은 하루가 그애의 어딘가에는 다른 문장으로 남아 있었다.
어제 세탁소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민혁이 직접 물어보라고 한 대로였다. 편의점 옆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물었다.
“아저씨, 문자 보내실 때 뭐가 제일 불편하세요.”
아저씨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낡은 폴더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금이 얕게 가 있었다.
“글씨가 쪼깐해서 눈이 침침해. 자꾸 딴 사람 번호로 가불더라고.”
그러고는 웃었다. 잘못 보낸 문자 때문에 세탁물이 뒤바뀐 적이 있다고,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으려다 그만두고 눈으로만 담았다. 집에 와 노트 여백에 짧게 적었다. 글씨 크게. 번호 헷갈리지 않게.
예전의 나였다면 그 대화에서 시장 규모부터 헤아렸을 것이다. 세탁소가 전국에 몇 곳인지, 건당 얼마를 붙일 수 있는지. 그런데 지금 내게 먼저 남은 건 아저씨의 침침한 눈과 웃음이었다. 숫자가 빠져나간 자리에 사람의 얼굴이 들어와 앉는 걸, 나는 마흔이 넘어 배우고 있었다.
빛이 상 위로 한 뼘쯤 더 밀려 들어왔다. 그 끝이 방구석에 닿았을 때, 옥색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통장이 아직 그 안에 있었다. 25년, 한 달에 몇만 원씩. 순천에서 엄마는 그것을 내 손목에서 밀어냈다. 빚 갚으란 돈이 아니라 밥값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은행에 가져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오래 손대지 못했다. 돌려줄 명분도, 갚을 방법도 이미 밀쳐졌으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 보자기가 다르게 보였다. 저것은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나를 지금까지 먹여 온 밥이 종이 위에 숫자로 쌓여 있는 것뿐이었다. 아버지가 부도 난 이듬해 봄, 새벽 네 시에 리어카로 배추를 다듬어 팔았다던 그 손. 그 손이 몇만 원씩 통장에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나는 볼펜을 다시 쥐었다. 이번엔 조바심 때문이 아니었다.
빈 장 맨 윗줄에 천천히 적었다. 엄마. 밥. 순천 새벽 배추. 글씨가 삐뚤었다. 삐뚤어진 그대로 두었다. 엄마가 통장 쪽지에 지운아 밥 묵고 댕기라, 하고 눌러쓴 그 글씨도 삐뚤었다. 지우지 않아도 되는 글씨가 있다는 걸 나는 그 쪽지에서 배웠다.
윗줄 하나가 채워지고, 그 아래는 다시 비어 있었다.
김치가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아도 알았다. 라면에 넣을 때마다 통 바닥이 훤히 드러났으니까. 낮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김치가 다 떨어졌으니 또 부쳐달라고. 예전이었다면 반찬값이라며 계좌로 얼마를 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이번엔 송금이 아니라 목소리로 말할 생각이었다. 엄마, 김치 떨어졌어. 그 한마디를 하려고 나는 아침부터 낮까지의 시간을 셈하지 않고 두었다.
남은 줄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준영이 좋아하던 국밥집 이름이 들어갈 자리도 아직 비어 있었다. 언젠가 그 골목에 다시 가서 간판을 확인하면 적으면 될 일이었다. 세탁소 아저씨의 이름도 나는 아직 몰랐다. 김씨의 진짜 이름도, 새벽 청소를 마치고 들어오던 아주머니의 이름도.
빈 줄은 잃어버린 자리가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이름들의 자리였다.
흰 종이 위로 빛이 고였다. 이삿날 밤 ATM 화면에 떴던 잔액 0원의 그 흰빛과 닮은 색이었다. 그때 나는 그 흰빛을 오래 들여다보며 발밑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 상 위에 누운 이 흰빛은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같은 0인데, 하나는 발밑이 꺼지는 흰빛이었고 하나는 아침이 고이는 흰빛이었다.
나는 볼펜 뚜껑을 닫아 노트 옆에 놓았다. 다음 줄을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 옆에 둔 삼각김밥의 비닐을 마저 벗겨 한 입 베어 물었다. 차가웠다. 데우지 않아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빛이 노트의 빈 장 위에 조금 더 오래 앉았다 갔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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