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빈손의 아침
32화. 올리브나무 아래 묻은 열쇠
“손님, 오픈은 열한 시예요. 좀 이르시네요.”
앞치마를 두른 젊은 사장이 물조리개를 들고 유리문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남의 가게 앞에 꽤 오래 서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니라고, 지나가던 길이라고 했다. 사장은 별 대꾸 없이 문 옆 화분으로 걸어가 올리브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잎사귀 사이로 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젖은 흙에서 비린 냄새가 올라왔다.
성수동의 이 골목은 여전히 좁고 비탈졌다. 나는 첫 사무실이 있던 상가 앞에 서 있었다. 통유리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던 자리, 지금은 그 안에서 원두 볶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문 옆 나무 간판에 흰 글씨로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 글씨를 오래 읽었다. 몇 번을 읽어도 그 자리에 내가 알던 상호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계단을 하루에도 스무 번씩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지하 서버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던 열쇠, 그 차가운 쇠붙이가 늘 오른쪽 주머니에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파산 서류의 채무자 칸에 이름을 적는 동안에도, 순천으로 내려가던 버스에서 무릎 위 보자기를 누르던 손도, 편의점 카운터 뒤에서 폐기 시간을 기다리던 밤에도, 그것만은 버리지 못했다. 다 무너진 걸 알면서도, 그 열쇠를 쥐고 있으면 어딘가에 아직 내 몫으로 남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열려고 하면 열 수 있는 문이 하나쯤은.
“여기 원래 뭐 하던 데였는지 아세요.”
내 물음에 사장이 조리개를 내려놓고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글쎄요. 저 들어오기 전엔 한참 비어 있었대요. 유리 다 뜯긴 콘크리트 방이었다던데. 인테리어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뼈대는 좋다고.”
나는 그 콘크리트 방을 알고 있었다. 유리가 다 떨어져 나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진 방. 내가 열쇠 하나만 챙겨서 마지막으로 걸어 나온 방.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사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리개를 든 채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원두 냄새가 잠깐 진해졌다가 이내 유리 안에 갇혔다.
혼자가 되자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생각보다 작았다. 밑동에 붉은 것이 옅게 배어 있었다. 은행에서 인주를 묻혀 서명하던 날, 손끝에 남았던 게 여기로 옮겨 온 자국이었다. 이 년 동안 주머니 안에서 닳고 닳았는데도 그 붉은 기운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방금 물을 준 흙은 젖어서 검고 차가웠다.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올리브나무 밑동 옆을 팠다. 흙은 쉽게 물러났다. 손톱 밑으로 축축한 것이 파고들었다. 어느 정도 깊어지자 나는 그 자리에 열쇠를 뉘였다. 붉은 밑동이 위를 향하도록 놓았다가, 다시 손으로 흙을 덮었다. 열쇠는 금세 아래로 사라졌다. 손바닥으로 흙을 두어 번 눌러 자리를 평평하게 골랐다.
이상하게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 년 동안 무음으로 온 독촉 전화를 받을 때도, 심문정에서 판사가 낭비를 물을 때도 떨리던 손이었다. 그런데 남의 가게 화분에 낡은 쇠붙이 하나를 묻는 지금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일어서니 오른쪽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늘 그 자리를 채우던 무게가 없어진 것뿐인데, 발이 한결 가벼웠다. 나는 화분을 한 번 내려다보고, 유리문 안쪽에서 잔을 닦는 사장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뒤돌아섰다.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준영이 좋아하던 국밥집 이름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노트의 그 줄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리스했던 세단의 월 납입금은 잊히지 않는데, 그애가 밥 사달라고 조르던 국밥집 간판은 통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여기 다시 올 거라는 것만은 알았다. 이 골목으로, 국밥집 간판을 확인하러. 그때 이름을 알게 되면 빈 줄에 적으면 될 일이었다.
걷는 동안 원두 냄새가 등 뒤로 조금씩 멀어졌다. 비탈 끝에 다다르자 그 냄새는 거의 사라지고, 대신 어디선가 오전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 냄새 같은 게 실려 왔다. 나는 화분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열쇠가 어느 계절엔가 뿌리에 걸려 다시 흙 밖으로 밀려 나올지, 아니면 그대로 삭아 없어질지, 그건 이제 내가 셈할 일이 아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