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31화 / 전 33화6

5부 빈손의 아침

31화. 사각형 두 개와 두꺼운 손가락

서지운


“이거, 한 시간밖에 못 가.”

민혁이 겨드랑이에서 노트북을 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은색 몸체의 모서리가 까져 회색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뚜껑에 스티커를 떼어낸 자국이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중고로 십오만 원 줬어. 배터리는 각오하고 써야 해.”

토요일 오후였다. 은수와 뚝섬을 걷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민혁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는 방을 한 바퀴 눈으로 훑고는 별말 없이 벽 쪽에 앉았다. 바닥 가까이 난 창으로 오후 볕이 들어와 그의 무릎께에 얹혔다.

나는 커피가 없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종이컵에 티백 하나를 담갔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컵을 건네자 민혁이 두 손으로 받아 감쌌다.

“손 시렸구나, 여기.”

그가 컵을 쥔 채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민혁이 노트북을 열었다. 부팅이 느렸다. 팬이 오래 돌고 화면이 겨우 밝아지는 동안, 나는 벌써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세탁, 수선, 동네 상권, 반경 안에 점포가 몇 개고 그중 몇 퍼센트가 스마트폰을 쓰고, 그 시장이 얼마고. 예전 같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제일 먼저 그 숫자부터 그렸을 것이다. 초기 밸류를 얼마로 잡을지, 몇 개월 뒤에 유저가 몇 명일지.

메모장이 떴다. 커서만 깜빡이는 흰 화면이었다.

“지운아.”

민혁이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봤다.

“뭘 만들지 말고, 누굴 도울지부터 정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방향을 먼저 묻는 질문이 이렇게 낯설 줄 몰랐다. 여태 나는 늘 무엇을, 얼마나 빨리, 얼마짜리로 만들지만 물어왔다. 누구를, 이라는 말 앞에서 머릿속의 숫자가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한참 만에 나는 세탁소 이야기를 꺼냈다.

“편의점 옆에 세탁소 있어. 아저씨가 예약을 손으로 장부에 적는데, 눈이 어두워서 자꾸 옷을 바꿔 내줘.”

지난주에도 봤다. 앞동 아주머니가 남의 코트를 받아 들고 되돌아오던 걸. 아저씨는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장부를 두 번 세 번 넘겼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어디가 잘못됐는지 끝내 못 찾았다.

“그런 사람한테, 문자 한 통. 옷 다 됐다고, 언제 찾으러 오라고. 그 정도면 돼.”

민혁이 천천히 타이핑했다. 자판을 하나씩 확인하듯 눌렀다.

“그 정도면 돼, 가 제일 어려운 스펙이야.”

그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우린 늘 그 정도를 넘어서려다 무너졌잖아.”

나는 옛 버릇대로 입을 뗐다.

“그럼 초기에 유저를 한 육 개월 안에...”

말이 반쯤 나오다 멎었다. 민혁이 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에러 났지? 로그 남겨둬.”

나는 웃음도 반성도 아닌 무언가를 삼켰다. 그러고는 종이컵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우리는 화면 하나를 그렸다. 민혁이 사각형 두 개를 나란히 그리고, 그 안에 글자를 넣었다. 하나는 ‘맡긴 옷’, 하나는 ‘찾을 날짜’. 그게 전부였다. 로그인도, 대시보드도, 우상향으로 올라가는 곡선도 없었다. 아저씨가 옷을 받으며 이름과 날짜만 누르면, 다 되는 날 손님 전화로 문자가 가는 것.

“버튼은 커야 해. 아저씨 손가락이 두꺼우니까.”

내가 말하자 민혁이 사각형을 조금 더 크게 늘렸다.

“이런 걸 왜 아무도 안 만들었을까.”

“돈이 안 되니까.”

민혁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낼 때 같았지만 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건 자랑할 데가 없어. 밸류를 못 붙이거든.”

밸류라는 말을 그가 먼저 꺼냈는데, 나는 그 단어에 예전처럼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멀게 들렸다. 성수동 루프탑에서 마이크를 쥐고 외치던 숫자가, 지금 이 방바닥의 사각형 두 개와 같은 언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배터리 경고가 떴다. 화면 오른쪽 위에 빨간 막대가 뜨고, 잠시 뒤 노트북이 한 번 깜빡였다. 민혁이 서둘러 뚜껑을 닫았다.

“다음엔 충전기 챙겨 올게.”

그가 노트북을 다시 겨드랑이에 끼고 일어섰다. 신발을 신으며 그는 이번 주말에 세탁소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보라고 했다. 정말 그런 게 있으면 쓰겠냐고, 얼마면 쓰겠냐고 말고, 그냥 불편한 게 뭐냐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민혁이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멀어진 뒤, 나는 방바닥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종이컵에 남은 물은 이제 다 식어 있었다.

나는 삼천 원짜리 노트를 폈다. 세훈의 이름과 김씨의 이름이 적힌 다음 장이었다. 빈 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사각형 두 개를 손으로 그렸다. 하나에 ‘맡긴 옷’, 하나에 ‘찾을 날짜’. 화면에서 본 그대로, 삐뚤어지지 않게 천천히 옮겼다.

버튼은 크게, 라고 그 옆에 적었다. 아저씨 손가락이 두꺼우니까, 도 적었다.

노트를 덮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예전이었다면, 나는 벌써 이 페이지 아래에 목표를 적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몇 개, 얼마. 그런데 이번엔 그 밑이 비어 있는 게 조급하지 않았다. 비어 있으니 세탁소 아저씨의 대답을 적을 수 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불편도, 이름도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창으로 든 볕이 어느새 벽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식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전기포트를 다시 올리지는 않았다. 종이컵을 창틀에 올려두고, 노트의 사각형 두 개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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