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30화 / 전 33화6

5부 빈손의 아침

30화. 식은 캔과 빈자리의 봄

서지운


냉이 냄새가 먼저였다. 뚝섬 둔치로 내려서는 계단 끝, 흙길에 발이 닿자 풋내가 훅 올라왔다.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풀리며 내놓는 냄새였다. 나는 달력을 보지 않고도 봄이 온 걸 알았다.

전날 밤에 은수의 문자가 왔었다.

“토요일 오후, 뚝섬. 걸을래?”

문장 끝에 물음표가 있었다. 나는 그 물음표를 오래 들여다봤다. 예전 같으면 답 대신 강변 어느 레스토랑의 예약 링크를 보냈을 것이다. 창가 자리, 코스, 일곱 시. 이번엔 “응, 갈게”라고만 적었다. 손끝이 근질거렸지만 더 붙이지 않았다.

은수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편집자들이 원고 뭉치를 넣고 다니는 검은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가방이 걸음마다 묵직하게 은수의 허리께를 쳤다. 교정지 한 뭉치가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은수는 주말에도 그걸 지고 다녔고, 나는 그걸 일에 잡아먹힌 사람의 짐이라고 여겼다. 지금 보니 그건 은수가 자기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의 무게였다. 나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두 시간 눈을 붙인 참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지 않고 자전거 도로 옆 흙길을 나란히 걸었다. 강물이 낮은 볕을 잘게 튕겨 냈다. 자전거들이 벨을 울리며 우리를 앞질러 갔고, 그때마다 은수는 반걸음 나에게 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바람이 강 쪽에서 불어왔다. 아직 물기가 남은 바람이라 옷깃 안으로 파고들면 서늘했다. 은수가 에코백 끈을 고쳐 멨다.

“무겁지 않아?”

내가 물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교정지. 월요일까지 봐야 해.”

은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들어 줄까.”

은수가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건 내 거야.”

그 말이 어쩐지 좋았다. 나는 더 조르지 않았다. 흙길이 발밑에서 조금씩 눌리는 감각이 있었다. 마른 데가 있고 아직 진 데가 있어서, 밟을 때마다 소리가 달랐다. 마른 데선 바스락, 진 데선 물컹. 나는 그 소리에 발을 맞춰 걷다가, 걷는 일에만 이렇게 집중해 본 게 얼마 만인가 생각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은수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예전이라면 나는 계획을 말했을 것이다. 단계, 분기, 언제까지 무엇을. 대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모르겠어. 정하고 싶지 않아, 이번엔.”

은수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급히 뭔가를 덧붙이려다 그만뒀다. 다음 주엔, 언젠가는, 곧. 그런 말들이 목까지 올라왔다. 나는 그 말들을 삼켰다. 얼마나 가볍게 태어나서 얼마나 쉽게 죽는지 이제 아는 말들이었다.

“재결합하자는 말도 안 할게.”

내가 말했다. 은수가 눈썹을 조금 올렸다.

“그 말도 결국 약속이잖아. 나는 약속으로 사람을 붙잡아 놓고 갚지는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은수가 작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그냥 웃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럼 뭘 하자는 건데.”

“처음부터. 그냥 다시 알아가는 거. 서지운이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아직 모르거든.”

나는 진심이었다. 800억을 외치던 남자도, 반지하 방에서 핸드폰 화면으로 잔고 0을 들여다보던 남자도, 둘 다 나한테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 둘 사이 어디쯤에 진짜 내가 있을 텐데,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은수가 걸음을 늦췄다. 몇 발짝 앞서 걷던 나는 발을 맞춰 다시 나란해졌다.

“당신, 예전엔 걸을 때도 앞만 봤어.”

은수가 말했다.

“그랬나.”

“응. 나랑 걷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려고 걷는 사람 같았어.”

나는 대답 대신 발끝을 봤다. 흙 위에 내 운동화 자국이 얕게 찍혀 있었다. 어디로 가려고 걷는 것과 그냥 걷는 것. 그 둘의 차이를 나는 이제야 몸으로 알고 있었다.

은수는 벤치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나도 옆에 앉았다. 벤치의 나무가 오후 볕을 머금어 미지근했다. 강 건너로 아파트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은수는 그 불빛을 오래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뭔가를 자꾸 채워 넣었을 것이다. 이번엔 가만히 있었다. 답을 재촉하지 않는 법을, 나는 새벽 편의점에서 배웠다. 폐기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 손님이 도시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기다림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그 자리에서 알았다.

바람에 은수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넘어왔다. 은수는 손으로 그걸 귀 뒤로 넘기고, 에코백을 무릎에 끌어안았다. 교정지 모서리가 가방 밖으로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빨간 펜 자국이 언뜻 보였다.

마침내 은수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당신이 안 보였어. 숫자가 당신 앞에 서 있어서.”

은수는 강에서 눈을 떼고 나를 봤다.

“근데 지금은 얼굴이 보여. 그게, 좋아.”

나는 목이 메었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아까 편의점에서 캔커피 두 개를 사 온 게 떠올랐다. 에코백을 뒤지지 않아도 알았다. 내 주머니에서 이미 다 식었을 것이다. 하나쯤 데워서 나올 걸 그랬다고 나는 생각했다. 데운다는 건 이제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다정함이었다. 30초씩 두 번, 그렇게 데우면 가운데까지 따뜻해진다는 것도 나는 남한테 배웠다. 야간에 같이 일하는 형이, 도시락은 한 번에 오래 돌리면 겉만 뜨거워진다고 가르쳐 줬다.

나는 주머니에서 캔 하나를 꺼내 은수에게 건넸다. 손끝에 닿는 게 미지근하지도 않고 그냥 차가웠다.

“식었네.”

은수가 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다음엔 데워 올게.”

내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음이라는 말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계획이 아니라 그냥 다음. 그 정도의 다음이라면 아직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수가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찬 커피를 넘기고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은수는 그걸 도로 내려놓지 않았다.

“차가운 것도 나쁘지 않네.”

은수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커피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흙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냉이 냄새가 아까보다 옅어져 있었다. 해가 내려가면서 흙이 다시 식어 갔고, 진 데를 밟는 발이 아까보다 더 자주 물컹거렸다. 계단 아래에서 은수가 물었다.

“다음엔 언제 볼까.”

내 손끝이 잠깐 저렸다. 다음 주 화요일, 아니 수요일, 오후엔 도서관, 새벽엔 근무. 오래된 습관이 벌써 요일과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계산을 멈췄다.

“네가 걷고 싶을 때 연락해. 나는 새벽만 아니면 대체로 비어 있어.”

비어 있다는 말을, 나는 부끄러움 없이 뱉었다. 예전에는 비어 있다는 게 곧 실패의 증거였다. 채워지지 않은 일정, 잡히지 않은 미팅. 이제 그 빈자리는 그냥 빈자리였다. 누가 걸어 들어와도 되는 자리.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캔커피를 여전히 한 손에 쥔 채였다. 에코백은 반대쪽 어깨로 옮겨 메어져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붙잡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몇 걸음 따라가서 한마디라도 더 얹었을 것이다. 이번엔 그 자리에 서서 은수가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봤다. 은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그게 서운하지 않았다.

그 봄밤 강가에서 나는 붙잡지 않는 것도 사랑일 수 있다는 걸 겨우 배웠다. 손에는 아직 식은 캔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시지 않고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집에 가서 데워 마셔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캔은 데우면 안 된다는 걸 떠올리고 혼자 피식 웃었다. 아직 배울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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