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9화 / 전 33화6

5부 빈손의 아침

29화. 잊은 이름들을 되찾아 적는 새벽

서지운


노트는 삼천 원이었다.

동네 도서관 열람실 맨 구석, 형광등이 제일 흐린 자리에 앉았다. 낮의 열람실은 조용했다. 자격증 책을 펼친 학생 몇과 신문을 넘기는 노인이 전부였다. 나는 표지를 넘겼다. 첫 장은 비어 있었다.

그 흰빛을 오래 봤다. 볼펜을 쥐고 맨 위에 한 줄을 적었다.

“800억이라고 믿었던 밤부터 0원이 된 아침까지.”

손이 멈췄다. 다음 줄을 쓰려는데, 벌써 변명이 되려고 했다. 시장이 얼었고, 고객사가 빠졌고, 투자가 철회됐다. 다 맞는 말이었고, 그래서 위험했다. 그럴듯한 문장은 나를 다시 그럴듯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실패를 적는다면서 또 나를 포장하는 손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규칙을 하나 정했다. 숫자 대신 이름을 적을 것.

민혁의 사원증. 은수의 캐리어. 엄마의 미수신 전화. 세훈이 데워준 도시락. 한 줄씩 내려갈 때마다 볼펜 끝이 느려졌다. 한 시간을 앉아 겨우 반 페이지를 채웠다.

이상한 데서 걸렸다. 리스했던 세단의 월 납입금은 아직도 정확했다. 백팔십사만 원. 계좌에서 매달 그 숫자가 빠져나가던 날짜까지 떠올랐다. 그런데 준영이가 좋아하던 국밥집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회식 때마다 그 애가 먼저 앞장서던 골목의 가게였다. 순대를 따로 시키고, 다대기를 반 숟갈만 풀던 얼굴은 선명한데 간판 글씨는 흐렸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부끄러움이 오래 갔다. 나는 사라진 것의 값은 외우면서, 남은 사람의 이름은 잊고 살았다.

밤에는 다시 편의점이었다.

새벽 두 시가 폐기 시간이었다. 나는 트레이를 들고 진열대 앞에 서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과 도시락을 골라 담았다. 손이 익어서 이제 라벨을 일일이 보지 않아도 됐다. 참치마요는 따로 뺐다. 청소 아주머니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대리운전을 하는 아저씨가 문을 밀고 들어온 건 그맘때였다. 그는 자기를 김씨라고만 불렀다. 이름도, 사연도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는 캔커피 하나를 계산대에 올리고 잔돈을 세는 대신 창밖 도로를 봤다. 콜이 오길 기다리는 눈이었다.

나는 데운 도시락 하나를 그의 앞에 슬며시 밀어놓았다.

“이거, 어차피 버릴 거예요.”

김씨는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만 까딱했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대신 나무젓가락을 반듯하게 쪼개 밥부터 떴다. 그 조용한 태도가 나는 편했다. 여기선 아무도 내가 뭐였는지 묻지 않았다.

청소 아주머니가 들어온 건 조금 뒤였다. 야간 청소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 손에서 락스 냄새가 옅게 났다. 아주머니는 참치마요를 집어들며 나를 봤다.

“총각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

나는 봉지를 묶던 손을 멈췄다. 뭐라고 대답할지 잠깐 골랐다.

“사연이 좀 길어요.”

아주머니는 더 캐묻지 않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며 툭 던졌다.

“다들 사연 하나씩은 있지.”

그 말이 이상하게 나를 놓아줬다. 나는 그동안 내 사연을 특별한 무엇으로, 남들과 다른 추락으로 여겼던 것 같다. 대단하게 오르지 못한 사람은 대단하게 떨어지지도 못한다는 걸, 나는 이 계산대 안쪽에 서서야 알아가고 있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각자의 새벽을 지나 여기까지 온 거였다.

나는 아주머니의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세훈이 알려준 방법이 있었다. 한 번에 오래 돌리면 밥이 딱딱해진다고, 삼십 초씩 두 번 나눠 돌리라고. 나는 그 말을 지켜서 삼십 초를 돌리고 문을 열어 트레이를 한 번 돌린 뒤 다시 삼십 초를 돌렸다.

세 시가 넘어 세훈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형, 오늘 참치마요 남았어요?”

남아 있었다. 나는 하나 남겨둔 걸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데워주겠다고 지난번에 했던 말이 그제야 생각났다. 세훈은 진열대에 기대서서 데워지는 도시락을 봤다.

“낮엔 뭐 해요?”

“노트에 뭘 좀 적어.”

“일기요?”

“실패한 기록. 근데 자꾸 변명이 돼서 잘 안 써져.”

세훈이 픽 웃었다. 전자레인지가 멈추고, 나는 뜨거워진 도시락을 그 애 앞에 내려놓았다.

“형, 그거 아세요?”

세훈이 뚜껑을 열며 말했다.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저 해고당한 날, 형 저한테 화 안 냈잖아요.”

나는 봉지를 묶던 손을 멈췄다.

“그것도 적으세요. 형 기억 속엔 나쁜 것만 남았을 텐데, 남들 노트엔 다른 게 적혀 있거든요.”

세훈은 그 말을 하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계산대 앞 유리에 야간 조명이 하얗게 번지고, 김씨는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 새벽 세 시의 편의점 안에 우리 둘만 남아 도시락 김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근무를 마친 건 아침 여섯 시였다.

반지하로 돌아와 나는 눕지 않고 노트를 다시 폈다. 첫 장 맨 아래, 반 페이지가 비어 있는 자리에 세훈의 말을 옮겨 적었다.

세훈은 해고당한 날 내가 화내지 않은 걸 기억한다.

한 줄을 쓰고 나서 볼펜을 놓았다. 낮에 못 채운 자리가 아직 넓었다. 준영의 국밥집 이름도 여전히 비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빈 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칸은 나에게 늘 실패의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이 아침엔 그 빈 줄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아직 거기 무엇을 적을지 몰랐고, 모른다는 게 이번엔 조급하지 않았다. 준영이 다음에 데려가겠다던 국밥집을 떠올려봤다. 거기서 간판을 다시 보면 이름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잊은 이름들을 하나씩 되찾아 적어 넣으면 될 일이었다.

창으로 아침 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노트 위에 얹혔다. 나는 볼펜 뚜껑을 닫고, 다 채우지 못한 페이지를 그대로 덮지 않은 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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