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빈손의 아침
28화. 면책 결정문과 엄마의 김치통
순천에서 올라온 뒤로 몇 달이, 셈하지 않는 사이에 지나갔다. 김 사장은 결국 고발하지 않았다. 이경한이 넣은 이체 내역서가 받아들여졌다는 말을, 나는 편의점 음료 냉장고를 채우다 전화로 들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결과는 자기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법원의 속도로 움직였고, 나는 그 속도를 재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엇이든 재는 버릇을 버리는 데가 제일 오래 걸렸다.
결정문은 아침에 왔다.
야간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우편함 틈으로 흰 것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서울회생법원. 나는 허리를 굽혔다. 반지하 우편함은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어서, 그 앞에서는 늘 등을 접어야 손이 닿았다. 봉투는 얇았다. 손바닥에 얹으니 무게가 거의 없었다. 7억 2천만 원을 지운다는 종이가 이렇게 가볍다는 게, 나는 계단참에 선 채로 잠깐 우스웠다.
방으로 들어와 봉투를 뜯었다. 종이 한 장이었다. 사건번호와 내 이름, 그리고 채무자에 대하여 면책을 결정한다는 문장. 활자에는 아무 온도가 없었다. 무너지던 2년도, 새벽 세 시의 독촉 전화도, 편의점 트레이에 남겨진 오천오백 원도 그 한 줄 안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을 읽어도 문장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날 전화기부터 들었을 것이다. 자축이라는 이름을 붙여 어딘가를 예약하고 사람을 부르고 카드를 긁어, 기분을 숫자로 바꿔놓았을 것이다. 좋은 소식일수록 크게 써서 증명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렸다.
나는 결정문을 식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종이의 흰 여백과, 이사 오던 밤 현금인출기에 떠 있던 잔액의 흰빛이 같은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다 잃은 자리였고 하나는 다 지워진 자리였는데, 둘 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나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파란 불이 바닥을 핥았다. 라면 봉지를 뜯어 스프를 미리 부어두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순천에서 올라올 때 엄마가 싸준 반찬통 두 개가 아래 칸에 그대로 있었다. 김치통 하나, 멸치볶음 통 하나. 올라온 뒤로 몇 주가 지나도록 나는 뚜껑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열면 안에서 무슨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밥은 묵고 댕기냐, 하는 소리 같은 것.
오늘은 김치통을 꺼냈다. 뚜껑 가장자리에 손톱을 걸고 당기니 딱, 하고 공기가 빠졌다. 시큼한 냄새가 얼굴로 훅 끼쳐왔다. 익다 못해 무르기 시작한, 냉장고 안에서 몇 주를 더 익어버린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잠깐 코끝에 두었다. 성수동 로비 화분 옆에서 옥색 보자기를 처음 풀던 밤에도 이 통에서 같은 냄새가 났었다. 그때는 맡기만 하고 뚜껑을 닫았다.
라면이 익는 동안 김치 몇 가닥을 접시에 옮겨 가위로 잘랐다. 도마는 없었다. 냄비째 식탁에 올려놓고, 김치 한 가닥을 면 위에 얹었다. 젓가락으로 건져 올리는데, 붉은 가닥 끝에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이 딸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순천에서 엄마가 처음 해준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부도난 이듬해 봄, 새벽 네 시에 시장 귀퉁이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배추를 다듬었다는 이야기. 겉잎을 벗기고 흙을 털어 단으로 묶던 손. 나는 그 손을 본 적이 없었다. 본 적 없는 손이 지금 내가 씹고 있는 김치의 맨 첫 자리에 있었다. 배추를 절이고 소를 넣은 건 엄마였지만, 그 배추가 자란 밭머리에는 그렇게 트고 갈라진 손들이 줄지어 있었을 것이다.
라면은 금방 불었다. 나는 불은 면을 국물째 떠먹었다. 김치는 시고 짜고, 아삭한 데보다 물러진 데가 많았다. 그래도 그릇을 비웠다. 편의점 폐기 도시락을 처음으로 끝까지 먹던 그 새벽처럼, 도망치지 않고 바닥까지 먹었다.
다 먹고 나서 휴대폰을 들었다. 엄마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엄마가 받았다.
“엄마, 나 빚 없어졌어.”
내가 말했다. 잠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저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렸다.
“밥은 묵었냐.”
엄마가 물었다.
“먹었어. 라면 끓여서, 엄마가 준 김치 넣고.”
“그 김치, 니가 열었냐.”
“응. 오늘 열었어.”
엄마는 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몇 주를 기다린 통, 그 뚜껑이 마침내 열렸다는 것을 엄마는 빚이 없어졌다는 말보다 더 오래 곱씹는 중이었다. 밥은 묵었냐, 그 짧은 물음 안에 엄마의 안도가 다 들어 있었다.
“김치 떨어지면 말혀. 또 부치께. 딴 말 말고 밥이나 잘 챙겨 묵어.”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나는 텅 빈 냄비와 반듯하게 놓인 결정문을 나란히 바라보았다. 냄비 바닥에는 국물이 얇게 남아 식어가고 있었고, 종이에는 7억이 지워졌다고 적혀 있었다. 두 개의 빈자리가 아침 속에서 나란했다.
예전이라면 이 고요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소리가 없으면 무너지고 있는 줄 알았으니까. 무언가를 사들이고 예약하고 사람을 부르지 않으면,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이날 아침의 고요에는 무너지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다 잃은 자리인데 무섭지 않았다.
나는 냄비를 개수대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결정문도 식탁에 그대로 두었다. 반지하 창으로 아침 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식탁 모서리에 닿았다. 0은 잃은 자리가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자리였다. 나는 그 위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아직 몰랐고,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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