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빈손의 아침
27화. 옥색 보자기가 비스듬히 덮은 밥상
무궁화호는 익산을 지나면서부터 자꾸 덜컹거렸다. 창밖으로 흙빛 논이 지나가고, 나는 옥색 보자기를 무릎에 올려둔 채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통장은 보자기 안에서 얌전했다. 25년 동안 몇만 원씩 찍힌 낡은 종이 한 권. 이걸 엄마 손에 도로 쥐여주면, 그러면 내 안에 쌓인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질 거라고 믿었다. 채무자 서지운이라는 글자를 서류마다 적어온 몇 달이었다. 이건 서류로 지워지지 않는 항목이었다. 그래서 직접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엄마 집 골목에 내리자, 마당에서 그 냄새가 났다. 볕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의 냄새. 반지하 냉장고 안 뚜껑도 안 연 김치통에서 새어 나오던 그 냄새와 같았다. 나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보자기를 풀었다. 통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이거… 못 받아. 이걸로 갚을 게 아니라, 엄마가 쓰셔야 돼.”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바닥이 차가웠고, 무릎뼈가 장판에 닿는 감각만 또렷했다.
엄마는 통장을 힐끗 봤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툭 밀어냈다. 늙은 손이었는데도 힘이 셌다.
“빚 갚으란 돈 아니여. 밥값이여. 일어나, 무릎 시리다.”
그 말만 하고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내민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한참 그대로 있었다. 돈으로 돌려주면 정산이 끝날 줄 알았다. 왼쪽 칸에 금액을 적고 오른쪽 칸을 비우면 아귀가 맞을 줄 알았다. 엄마 앞에서는 아귀가 맞지 않았다. 밀려난 손목이 허공에 떠 있었다.
부엌에서 물소리가 나고,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통장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방구석에 밀어두고 부엌 문턱까지 갔다. 문턱에 서서 엄마의 등을 봤다. 굽은 등이었다. 냄비에서 된장이 끓고, 갈치가 기름에 오그라들었다. 김이 창문을 뿌옇게 덮어서, 유리에 엄마의 실루엣만 흐릿하게 번졌다.
“엄마, 나 돈도 없고, 회사도 없어. 이제 편의점에서 밤에 일해.”
굳이 그렇게 말했다. 초라함을 내가 먼저 꺼내 보이면 덜 아플 것 같았다. 던힐이 몇 번이고 폐기 도시락이 몇 시부터 맛있는지 아는 사람이 됐다는 걸, 엄마가 놀라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버리고 싶었다.
엄마는 국자를 놓지 않았다.
“밥은 묵고 댕기냐. 딴 말 말어.”
나는 문틀에 손을 짚었다. 통장 쪽지에 삐뚤게 적혀 있던 그 글자와 거의 같은 말이었다. 밥 묵고 댕기라. 25년 동안 엄마가 나한테 한 말은 결국 그 한 문장이었던 것 같았다. 다른 말은 없었다. 그 말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밥상에 마주 앉았다. 엄마는 갈치 가운데 토막을 젓가락으로 발라 가시를 빼더니, 살만 내 밥 위에 올려줬다. 대가리 쪽 토막은 자기 앞에 뒀다. 나는 그걸 봤다. 예전에는 눈에 안 들어오던 순서였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이었다.
“느그 아버지, 부도나고 그 이듬해 봄에 여그 시장서 리어카 하나 끌었어야.”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내 안에서 아버지는 불 꺼진 거실에 굽은 등으로만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 등을 나는 오래 무서워했고, 무서워한 만큼 경멸했다.
“새복 네 시에 나가서 배추 떼다 팔고, 안 팔린 거는 저녁에 다시 다듬어서 다음날 또 내놓고. 손이 다 텄제. 겨울에는 피가 배 나오는 것도 있고.”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김치 꺼내는 이야기 하듯이.
“무너진 사람이 그냥 무너져만 있간디. 니는 몰랐제. 우리가 안 뵈줬으니께. 애기한테 그런 거 보이는 거 아니라고, 느그 아버지가.”
나는 국물만 떠 넣었다. 뜨거운 된장이 목 안에서 걸렸다. 통장에 한 달에 몇만 원씩 찍힌 그 숫자가, 실은 새벽 네 시의 손이 튼 냄새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나는 그 숫자를 며칠 전 서류 위에서 원금 상환액으로 계산해보려 했었다. 3천몇백. 그 몇 자리 숫자에는 배추 이파리 다듬던 저녁이 붙어 있었다. 숫자로는 한 번도 안 보이던 것이었다.
나는 통장을 돌려주러 온 게 아니었다. 이 밥상 앞에 앉으러 온 거였다. 갈치 가운데 토막을 씹는데, 살이 부드럽게 발라졌다. 갚아야 할 것인 줄 알았던 게 실은 받아야 하는 거였다. 받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 나는 그걸 여태 부채로만 적어왔다. 잔고 0원인 손으로 나는 지금 밥을 받고 있었다. 0인데도 앞에는 밥이 있었다.
“엄마,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내가 물었다.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 묵어. 더 있어야.”
엄마가 냄비를 다시 불에 올렸다. 갈치 한 토막이 아직 접시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토막을 오래 봤다. 서울로 올라가는 저녁 버스 시간을 계산하려다가, 그냥 두었다. 아직 김 사장이 고발을 취하했다는 연락도 없었고, 법원에서 무슨 통지가 올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데, 나는 밥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을 더 받았다. 방구석에 밀어둔 옥색 보자기 위로 오후 볕이 비스듬히 내려앉는 게, 밥을 먹는 내내 눈 끝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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