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6화 / 전 33화6

4부 법정

26화. 법원 계단 위의 로그

서지운


“심문 끝났어?”

계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나는 법원 문을 밀고 나온 참이었고, 3월의 볕이 정면으로 얼굴에 쏟아지던 참이었다. 눈이 부셔서 손차양을 만들고서야 그가 보였다. 회색 후드 위에 낡은 코트. 2년 만이었다. 민혁이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손에는 종이컵이 두 개 들려 있었다. 김이 옅게 피어올라 볕 속에서 흩어졌다. 나는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머릿속에 답이 들어갈 자리가 텅 비었다. 예전 같으면 결과를 요약하고, 다음 액션을 정리하고, 안건을 정했을 것이다. 그런 문장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민혁이 계단을 두 칸 올라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받았다.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손바닥에 감기는 온도였다. 나는 그 온기가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런 걸 잊고 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네 문자가 맞았어.”

내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심문정에서는 갈라지지 않던 목소리였는데, 계단 위에서 그게 무너졌다.

“너는 로그를 지우려고만 했다고. 그거. 2년 전에도 맞았고, 지금도 맞아. 미안하다.”

민혁은 나를 보지 않았다. 계단 아래 도로를 봤다.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다리가 지나갔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화낼수록 낮아지던 그 목소리는 이번엔 화가 없어서 낮았다.

“네가 사원증 반듯하게 놓고 나갈 때.”

그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나는 그게 배신 같았어. 진짜로. 근데 아니었지. 넌 그냥 답장을 기다린 거였어.”

나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의 문자 아래에 한 줄을 적고,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그대로 멈춰 있던 밤. 네 로그, 아직 읽고 있어.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나는 그 문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 문자, 아직 안 보냈어.”

내가 말했다.

“손가락만 올려놓고.”

민혁이 그제야 나를 봤다. 눈가에 잔주름이 늘어 있었다. 2년 동안 그도 어딘가에서 늙었다. 그가 종이컵을 한 모금 마시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보내지 마. 이렇게 말로 하면 되지.”

그가 잠깐 아래를 다시 봤다.

“시스템은 죽어도 데이터는 남아. 서버 내려도 로그는 어딘가 남듯이. 우리도 그래.”

나는 그 말이 목에 걸렸다. 대답할 말을 고르는 대신 계단에 앉았다. 돌의 냉기가 바지 밑으로 올라왔다. 3월인데도 돌은 겨울을 다 놓지 못하고 있었다. 민혁이 한 칸 옆에 앉았다. 코트 자락이 계단에 끌렸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끝만 봤다. 서류 봉투를 든 사람, 아이를 안은 사람, 담배를 무는 사람. 각자의 심문을 마쳤거나 앞둔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로 볕이 계단을 반쯤 잘라 그늘과 나눠 가지고 있었다.

“회사, 코드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나왔더라.”

내가 겨우 말을 꺼냈다.

“결제 모듈. 로그가 하도 깨끗해서 내가 한참 읽었어. 자정 지나서 멈추는 것까지 봤어.”

“당연하지.”

민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음 사람이 읽을 거니까.”

다음 사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다음 사람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지금의 숫자만 봤다. 이번 달 잔고, 이번 라운드 밸류, 이번 분기 성장. 다음 사람이 읽을 것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남겨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지금껏 미안하다는 말을 송금으로 했다. 보너스로, 봉투로, 메모칸을 비운 삼백만 원으로 했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고, 말로만 미안하다고 했다. 종이컵 하나가 전부인 손이었다. 그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싶었다. 2년이나 걸릴 일이었나.

볕과 그늘의 경계가 우리 발끝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해가 조금씩 자리를 옮겨서, 아까 그늘이던 내 신발코가 어느새 볕 속에 들어와 있었다.

“밥은.”

민혁이 물었다.

“먹었어?”

나는 웃음이 났다. 소리가 나게 웃은 건 오랜만이었다. 엄마 같은 소리를 CTO가 하고 있었다. 밥은 묵고 댕기냐, 딴 말 말어. 순천 사투리가 서울 법원 계단 위에 겹쳐 들렸다.

“아직.”

“가자. 데이터 남기게.”

그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코트 자락이 다시 계단을 쓸었다. 나도 종이컵을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다리가 저려서 잠깐 휘청했다. 민혁이 팔꿈치를 슬쩍 받쳤다가 놓았다.

주머니 속 잔고는 여전히 0원이었다. 아직 김 사장이 고발을 할지도, 판사가 무엇을 통지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옆에 사람 하나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발소리가 내 발소리와 반박자 늦게 계단에 닿았다.

법원 앞 도로에서 그가 어느 쪽으로 갈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앞장서 걸었고, 나는 따라 걸었다. 그가 아는 국밥집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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