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법정
25화. 꺾인 어깨와 0원의 잔고
“사실만, 짧게. 감정은 나중에요.”
이경한이 서류 봉투를 무릎 위에서 반듯하게 세우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05호 심문정은 생각보다 좁았다. 나무 방청석은 비어 있었고, 판사석과 내 자리 사이에는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손바닥이 젖어 봉투 모서리가 눅눅해졌다. 나는 그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자꾸 눌러 폈다.
판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서류를 한 장 넘기는 소리가 방을 다 채웠다.
“채무자는 지난 2년간 리스와 접대로 1억 원 이상을 지출했습니다. 이 소비가 파산에 이른 원인이라는 채권자 측 지적이 있습니다. 소명하시겠습니까.”
나는 봉투를 열었다. 준비한 문장이 첫 줄부터 놓여 있었다. 회사의 존속을 위한 불가피한 대외비용이었다. 업계의 관행이었다. 그 문장들을 나는 사흘 밤을 다듬었다. 지금 종이 위에서 그 글자들은 낯선 사람의 필체 같았다. 누가 나 대신 앉아 있다가 방금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나는 봉투를 덮었다.
“저는, 결핍을 돈으로 메우려 했습니다.”
판사가 펜을 멈췄다. 옆에서 이경한이 나를 돌아보는 기척이 났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차가 필요했던 게 아닙니다. 무너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 저녁 자리들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제 두려움을 감추는 값이었습니다. 얼마짜리 두려움인지 매달 카드 명세서로 확인했습니다.”
말을 뱉는 동안 마이크가 낮게 웅웅거렸다. 그 소리 아래로 다른 소리가 겹쳐졌다. 오래 잊고 있던 소리였다. 나무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 어른들이 목소리를 낮추는 소리.
1998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복도 끝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 안쪽에 아버지가 있었다. 보증 때문에 무너진 뒤 어느 법정에 불려간 아버지였다. 문틈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안으로 말리고 목이 앞으로 꺾인 자세였다. 나는 그 자세를 오래 경멸했다고 믿어왔다. 저렇게는 되지 말자고, 저 어깨는 내 어깨가 아니라고.
그런데 지금 마이크 앞에서 내 어깨가 딱 그만큼 안으로 말려 있었다. 목이 앞으로 꺾이고, 두 손이 봉투 위에서 오그라들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경멸한 게 아니었다. 무서웠던 거였다. 저 자세가 언젠가 내 몸에 그대로 옮겨 붙을까 봐. 그리고 지금, 옮겨 붙어 있었다.
“채무자.”
판사가 다시 불렀다.
“김 아무개 씨에게 폐업 직전 빌린 자금은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직원 열 명의 밀린 월급으로 전액 이체됐습니다. 통장 사본은 서류에 있습니다.”
이경한이 봉투에서 이체 내역서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서기가 받아 판사에게 올렸다.
“특정 채권자를 먼저 갚으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 이름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회사 스프레드시트에서 그 이름들은 인건비 숫자였는데, 마지막에는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판사가 내역서를 넘겼다. 심문정은 종이 소리만 났다. 넘기고, 멈추고, 다시 넘겼다. 나는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 세는 버릇이 그 방에서만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 잔고는.”
“0원입니다.”
처음이었다. 그 숫자를 부끄럼 없이 말한 게. 성수동 루프탑에서 백이십억을 외치던 입과 같은 입이었다. 판사가 안경 너머로 잠깐 나를 보았다.
“채무자는 재산은닉이나 편파변제를 부인하는 겁니까.”
“부인이 아니라, 숨긴 게 없습니다.”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저는 오래 기록을 지우며 살았습니다. 불리한 건 덮고, 못난 건 없앴습니다. 이번엔 하나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남겨뒀습니다.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잔고가 0이 되고 나서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날 법정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끝내 듣지 못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복도에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 안에서 어깨를 만 채로, 지울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세고 있었을 것이다. 곗돈. 반찬통. 자기가 무너지는 걸 지켜본 어린 아들의 얼굴. 갚을 항목이 없어서 평생 못 갚는 것들.
판사가 펜을 놓았다.
“결정은 추후 통지하겠습니다.”
나는 봉투를 가슴에 안고 일어섰다. 다리가 저려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몰랐다.
복도로 나오자 이경한이 반보 뒤에서 따라왔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변명을 접은 건, 잘한 겁니다.”
그가 잠깐 말을 끊었다.
“결과는 저도 모릅니다. 그건 알아두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끝에 창이 하나 있었다. 반지하 창이 아니었다. 지면과 나란히 붙어 발목만 지나가는 창이 아니라, 내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 뜬 창이었다. 오후 볕이 그 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그 볕을 오래 보았다. 김 사장이 형사 고발을 할지, 판사가 면책을 내줄지, 7억이 지워질지 남을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정해진 건 하나뿐이었다. 나는 방금, 처음으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말을 마쳤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이경한이 먼저 탔다. 나는 창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가, 봉투를 고쳐 안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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