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4화 / 전 33화6

4부 법정

24화. 옥색 보자기와 25년의 통장

서지운


박스 세 개 중 맨 위 것부터 다시 뒤졌다. 심문이 사흘 남았고, 나는 재산 목록에서 뭘 빠뜨렸을까 봐, 아니 사실은 손을 멈추는 게 무서워서 새벽에 그것들을 열었다. 벽에는 이경한이 준 서식이 든 봉투가 기대 서 있었다. 그 봉투는 곧 판사 앞에서 읽어야 할 2년이었고, 이 박스는 그 2년보다 더 오래된 무언가였다.

맨 아래 박스에서 옥색 천이 나왔다. 접힌 자리마다 볕에 바랜 선이 하얗게 앉아 있었다. 성수동 서랍에서 통째로 쓸어 담은 것들 사이, 김치통 옆에 그게 있었다. 통 뚜껑을 잠깐 열자 시큼하고 마른 냄새가 올라왔다. 순천 마당에서 나던 냄새. 나는 뚜껑을 도로 덮었다. 지금 열 자신이 없었다.

보자기는 여전히 두 번 감겨 있었다. 엄마는 뭔가를 아까워하며 쌀 때 늘 두 번을 감았다. 한 번으로는 풀릴까 봐. 나는 그 매듭에 손을 댔다. 처음엔 이걸 어느 칸에 적을지부터 생각했다. 3천몇백만 원. 봉투 안의 액수를 빚에서 빼면 잔여 채무가 얼마가 되는지, 손가락은 벌써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성수동에서도 그랬다. 엑셀 창을 열었다가, 그 숫자를 채권 계산에 밀어 넣으려다, 창을 닫았다. 이경한에게도 끝내 말하지 못한 칸이었다.

매듭이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그게 천이 미끄러워서인 줄 알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나서야, 미끄러운 건 내 손이라는 걸 알았다.

봉투 안에는 낡은 통장 하나와 접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통장을 펼쳤다. 첫 줄이 25년 전이었다. 3만 원. 다음 줄, 5만 원. 어떤 달은 만 원. 또 어떤 달은 건너뛰었다가, 그다음 달에 두 번 찍혔다. 마감 끝난 식당에서 젖은 앞치마를 벗고, 은행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창구 앞에서 한 줄씩 눌러 찍었을 숫자들이었다. 나는 800억이라는 밸류에이션을 무대에서 외친 사람이었다. 그 앞에서 샴페인이 성공의 촉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통장의 마지막 줄, 3천몇백만 원 앞에서 나는 숫자를 셀 수가 없었다. 세는 법을 잊은 게 아니라, 세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건 잔고가 아니었다. 25년이었다. 한 줄이 한 달이고, 한 달이 마감 끝난 밤 하나였다.

쪽지를 폈다. 삐뚤삐뚤한 글씨였다. 지운아 밥 묵고 댕기라. 마침표도 없었다. 나는 그 여덟 글자를 읽고, 다시 읽었다. 전화기 너머로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를 말이었다.

“밥은 묵고 댕기냐. 딴 말 말어.”

나는 늘 송금으로 답했다. 아버지 기일에 삼백만 원. 엄마 생일에 삼백만 원. 메모칸은 비운 채로. 은수가 그걸 짚었을 때, 나는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돈을 보냈으면 마음도 보낸 거라고 생각했다. 밥 먹으라는 말에 나는 한 번도 밥으로 답한 적이 없었다.

지면과 나란한 창으로 새벽의 회색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나는 거기 주저앉았다. 냉장고가 낮게 돌아갔고, 그 안에는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반찬통 두 개가 있었다. 김치통과 멸치볶음 통. 엄마가 문 앞에 두고 간 것들.

1998년, 부도 뒤에 아버지는 불 꺼진 거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등을 봤다. 그때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삼킨 걸 다시 삼키다가, 결국 삼킨 것에 눌려서.

나는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나도 놀랄 만큼 낮은 소리였다. 목이 아니라 배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통장을 가슴에 안았다. 한 손에는 쪽지를 쥐었다. 여덟 글자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나는 그걸 펴지도 못하고 오래 울었다. 어깨가 흔들렸고, 반지하의 회색빛이 젖은 뺨 위로 번졌다.

7억 2천만 원은 서류 몇 장이면 지워진다. 이경한이 그렇게 말했다. 면책 결정문 한 장이면 채권자 목록의 숫자들이 전부 0이 된다. 그런데 이 여덟 글자는 목록에 넣을 수가 없었다. 법으로 지워지지 않고, 면책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갚을 항목이 없어서 평생 갚지 못하는 빚이 있다는 걸, 나는 잔고가 0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지울 수 있는 건 가벼웠고, 지울 수 없는 건 무거웠다. 나는 오래 그 순서를 거꾸로 알고 살았다.

한참 뒤에 울음이 잦아들었다. 방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나는 엎어둔 휴대폰을 뒤집었다. 화면에 엄마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고, 그 위로 새 부재중 하나가 더 늘어 있었다. 시각은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어서였다. 엄마는 첫차를 타려고 벌써 일어나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끝이 아직 젖어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밥 먹었다고 해야 하나. 통장을 봤다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는 말은 또 어느 칸에 넣어야 하나.

신호가 갔다. 나는 이번엔 화면을 뒤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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