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법정
23화. 텅 빈 자리를 증명하는 장부
심문까지 열흘이었다.
이경한이 준 서식을 방바닥에 펼쳤다. 재산 목록 한 장, 소비 내역 소명서 몇 장. 그 옆에 은행에서 뽑아온 2년치 거래 명세를 늘어놓자 종이가 방을 가로질렀다. 접힌 자리마다 각이 서서, 펴놓고 보니 두루마리 같았다. 형광등 하나는 여전히 나가 있었고, 남은 불빛이 종이 위를 노랗게 적셨다.
볼펜을 쥐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고정비, 변동비, 접대비. 항목을 나누는 셈법이 아직 손끝에 붙어 있었다. 첫 줄부터 낯선 숫자가 나를 마주 봤다. 독일제 세단 리스, 월 190만 원. 계약 기간 36개월. 잔여 위약금까지 괄호 안에 적혀 있었다.
가죽 냄새는 기억났다. 새 차 특유의, 코를 찌르지 않고 목 안쪽에 고이던 냄새. 시동을 걸면 계기판에 뜨던 파란 숫자도 기억났다. 그런데 조수석에 누구를 태웠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명세를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시리즈B 파티 다음 날 호텔 라운지 결제, 320만 원. 그날 샴페인 거품이 손등을 타고 흘렀고, 나는 그 촉감을 성공이라 불렀다. 그 바로 아랫줄에 여의도 심사역들과의 저녁이 찍혀 있었다. 한 병에 40만 원짜리 와인, 세 병.
“형님이 쏘셔야죠.”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날 잔을 부딪친 사람이 넷이었는지 다섯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대보려 했지만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직함과 회사 이름은 떠오르는데, 이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기사가 터지고 투자가 철회되던 새벽, 통화 목록을 위아래로 넘기며 전화할 사람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스쳐 지나간 이름들이 지금 이 명세서 위에 다시 떠올랐다.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부딪치고, 다음 라운드를 이야기하던 이름들. 나는 그 관계에 매달 수백만 원을 썼다. 남은 건 영수증 한 줄이었다. 관계처럼 보이던 것들이 전부 접대비 칸으로 정산되어 있었다.
계속 적었다. 손이 멎은 곳은 다른 줄이었다.
엄마 기일 송금, 300만 원. 메모칸은 비어 있었다. 은수가 마지막으로 짚어낸 그 빈칸이었다. 그 아래, 아내 생일에 보낸 백화점 상품권. 그 옆에는 결혼기념일 식당 예약금.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 대신, 나는 매번 숫자를 건넸다. 사랑을 항목으로 나눠 정산해온 장부가 거기 있었다.
나는 서식 뒷장을 넘겼다. 습관대로 표를 그렸다. 세로선을 긋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눴다. 대차대조표. 손이 알아서 그 모양을 만들었다.
왼쪽에 적을 것은 많았다. 세단, 와인, 라운지, 이름 모를 얼굴들. 리스와 접대로 나간 돈만 훑어도 금방 채워졌다. 오른쪽 칸은 오래 비어 있었다. 나는 볼펜 끝을 그 위에 대고 한참 있었다. 그러다 적기 시작했다.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은수의 캐리어 두 개. 반듯하게 책상에 놓이고 간 민혁의 파란 사원증. 화면을 뒤집어 놓고 끝내 받지 못한 엄마의 전화 두 통. 냉장고 안에서 아직 뚜껑을 열지 못한 반찬통. 오른쪽 칸의 것들은 어느 것도 금액으로 적을 수 없었다. 나는 숫자 대신 이름만 적었다.
접대와 리스로만 2년간 얼마가 나갔는지 더해봤다. 1억이 넘었다. 볼펜을 든 채 그 숫자를 오래 봤다. 그 돈이면 직원 열 명의 밀린 월급이었다. 그 돈이면 엄마가 25년 부은 곗돈이었다. 그 돈이면 은수가 물었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볼펜을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안이 어두웠다. 이건 재산 목록이 아니었다. 돈으로 메우려 했던 자리마다, 그 구멍의 크기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채우려 애쓸수록 왼쪽 칸만 길어졌다. 오른쪽에 적힌 것들은 그 애씀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들이었다.
마지막 칸으로 갔다. 현재 잔고. 나는 거기에 0을 적었다.
동그란 획을 그리고 손을 뗐다. 그 0은 더 이상 나를 겁주지 않았다. ATM 화면에서 흰빛으로 떴을 때는 등이 서늘했는데, 볼펜으로 그려놓고 보니 그저 조용했다. 다만 그 위쪽으로 빼곡한 숫자들이 남아 있었다. 텅 빈 자리를 채우려고 얼마나 오래 애썼는지, 그 숫자들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명세서를 접었다.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눌러 각을 세우고, 서식과 함께 봉투에 넣었다. 심문정에서 이걸 읽어야 한다. 항목을 나누지 않고, 변명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는 봉투 입구를 접어 서랍이 아니라 벽에 기대 세워두었다.
형광등이 지지직 한 번 울었다. 나는 불을 끄지 않았다. 남은 명세를 마저 짚어 내려가며, 왼쪽 칸의 숫자를 하나씩 다시 읽었다. 얼마를 썼는지가 아니라, 그때마다 무엇을 지나쳤는지를 세는 밤이었다.
열흘 뒤, 나는 저 봉투를 들고 법원 계단을 올라야 한다. 봉투 안에는 내가 사들인 2년이 들어 있었다. 판사 앞에서 나는 어느 칸부터 읽게 될까.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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