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2화 / 전 33화5

3부 영(零)의 방

22화. 오천오백 원의 각도

서지운


전송하지 못한 문장은 그날 밤새 화면 속에 그대로 있었다. 아침이 되어 배터리가 나가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열두 계단 아래 문에 흰 것이 꽂혀 있었다. 우편함이 아니라 문틈이었다. 반쯤 접힌 봉투 두 장이 손잡이 위 좁은 틈에 걸려 있었다. 나는 열쇠를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그것부터 뽑았다. 틈에 물려 있던 종이가 잘 빠지지 않아 두어 번 당겼다. 세게 당긴 마지막에 모서리가 살짝 찢겼다. 손끝에 종이의 마른 결이 스쳤다.

서울회생법원. 겉면의 붉은 관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파산 심문 기일 통지서. 봉투를 뜯는데 접착선이 매끄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손톱을 밀어 넣어 억지로 뜯었다. 종이 안쪽에 손끝이 베일 듯 지나갔다. 새벽 내내 던힐과 말보로의 진열 번호를 짚던 손이 이 손이 맞나 싶었다. 그 손은 담뱃갑을 정확한 칸에 꽂아 넣던 손이었는데, 지금은 종이 한 장을 여는 데 두 번을 헛짚었다. 날짜와 법정 호수가 적혀 있었다. 오라는 곳과 오라는 시간이 분명했다. 나는 그 숫자를 두 번 읽고도 무슨 뜻인지 곧장 들어오지 않아 세 번째로 읽었다.

그 아래 또 한 장이 있었다. 채권자 이의신청서. 문장 하나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채무자는 폐업 직전 대출금을 유용한 사기적 파산의 혐의가 있으며, 형사 고발을 검토한다. ‘사기’라는 두 글자에서 눈이 멎었다. 나는 그 단어를 손끝으로 짚었다. 종이 위에서 그 글자만 유난히 검게 눌려 있었다. 신청인 이름을 보았다. 김 사장이었다. 브리지 미팅이 연쇄로 깨지던 무렵, 은행이 문을 닫은 뒤 마지막으로 급전을 대준 사람. 나는 그 돈으로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메웠다.

그게 유용인가.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되물었다.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문 안쪽에서 낮게 새어 나왔다. 봉투를 쥔 손에서 종이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밤새 근무한 손에 밴 땀인지, 아침 계단의 습기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경한을 다시 찾아간 건 사흘 뒤였다. 형광등 하나가 여전히 나가 있는 그 상담실이었다. 그는 이의신청서를 받아 천천히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방 안에서 유난히 컸다.

“이의가 들어오면 면책 심문에서 소명하셔야 합니다.”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재산은닉이나 편파변제로 인정되면, 면책이 기각될 수 있어요.”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기각되면요.”

그가 잠시 나를 봤다. 나간 형광등 쪽 그늘이 그의 반쪽 얼굴을 덮고 있었다.

“칠억 이천, 그대로 남습니다. 평생.”

그 순간 손이 떨렸다. 감추려고 무릎 위를 눌렀는데 무릎까지 떨렸다. 나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입을 떼려는데 성수동 사무실 서랍이 먼저 떠올랐다. 맨 아래 칸, 열어보지 못한 채 넣어둔 엄마의 옥색 보자기. 그 안에 곗돈 봉투가 있었다. 엄마가 이십 년을 부어 만든 돈이었다. 폐업이 눈앞에 오던 어느 밤, 나는 그 보자기를 꺼내 무릎에 올려놓고 매듭을 풀지 못한 채 오래 앉아 있었다. 이 돈을 빚 계산에 넣으면 얼마가 줄어드나. 엑셀 창에 그 숫자를 쳐 넣었다가 지웠다. 넣었다가, 지웠다. 매듭은 끝내 풀지 않았다.

감춘 건 없었다. 그 돈은 엄마 것이었고 지금도 서랍에 있다. 다만 계산에 넣어보려던 마음이 있었다. 잠깐이라도 그것을 내 몫으로 세어본 밤이 있었다. 감추지 않은 것과 감추려 했던 마음의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판사 앞에서 그 밤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없다고 하면 거짓이고, 있다고 하면 무엇을 자백하는 건가. 입이 붙었다.

“편파변제라는 게,” 나는 겨우 말했다. “직원 월급을 준 것도 거기 들어갑니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정 채권자만 갚았다면요.”

이경한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심문에서 판사가 물을 겁니다. 왜 그 돈을 그렇게 썼는지. 있는 그대로 말씀하세요. 꾸미면 오히려 불리합니다.”

있는 그대로.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을 데가 없어서 그냥 들었다. 옥색 보자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야 하나 잠깐 생각했지만, 목까지 올라온 그 말을 다시 삼켰다.

그날 밤 근무 중이었다. 새벽 세 시, 자동문이 열렸다. 나는 담배 진열장 앞에서 폐기 시간을 확인하다 돌아섰다. 김 사장이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린 채였고, 얼굴이 그새 많이 상해 있었다. 볼이 꺼지고 눈 밑이 검었다.

“여기서 일하네, 서 대표.”

대표라는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 나는 계산대 안쪽에 섰다. 등 뒤가 담배 진열장이었다.

“그 돈, 어디다 썼어.”

그가 계산대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이 유리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나는 사업 살린다고 믿고 빌려준 거야. 서 대표가 살아난다길래. 나도 그 돈 어디서 났는지 알아? 처가에서 끌어온 거야.”

“직원들 밀린 월급으로 나갔습니다.”

“그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돈은 못 돌려받고. 자네 직원들은 받고. 그게 공평한 거야? 나도 사람 부리는 사람이야. 내 밑에도 월급 기다리는 애들 있어.”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공평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늘 계산기를 먼저 들었었다. 이번엔 들 것이 없었다. 통장에 0원이 찍힌 흰 화면이 떠올랐다. 담보도, 소득도, 감출 것도 없었다. 감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그게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다.

“사기라고 쓰셨더군요.”

내가 말했다.

“내가 그 돈으로 뭘 빼돌렸다고요.”

“그럼 아니야? 받자마자 없어졌잖아.”

“직원 통장으로 그날 다 나갔어요. 이체 내역 보시면 됩니다. 열 명 몫이었어요.”

김 사장의 입이 한 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그가 계산대 유리에서 손바닥을 뗐다.

“고발하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숨긴 건 없어요. 정말로요. 재산이 있었으면 사장님부터 갚았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없어서 못 갚은 거예요. 지금 제가 가진 게 이 야간 시급밖에 없어요.”

김 사장이 나를 한참 보았다. 새벽 세 시의 편의점 불빛 아래 그의 눈이 붉었다. 그도 나만큼 절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걸 알았다. 그는 나를 무너뜨리러 온 게 아니라, 자기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온 거였다. 이의신청서에 ‘사기’라고 눌러 쓴 그 손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밤을 새우고 온 손일 것이었다.

“자네가 그 파티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무슨 파티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성수동 루프탑, 잔이 부딪히던 소리. 그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웃고 있었고, 지금 그 웃음의 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냉장 코너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찬 김이 흘러나왔다. 도시락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툭 내려놓았다. 제육이었다.

“찍어.”

나는 스캐너를 들었다. 바코드에 붉은 선이 지나갔다. 한 번에 잡히지 않아 도시락을 살짝 돌려 다시 댔다. 삑, 소리가 났다.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화면에 사천오백 원이 떴다.

“사천오백 원입니다.”

그가 점퍼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지폐가 그의 손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받아 지폐함에 넣고 거스름돈을 셌다. 오천 원 한 장, 오백 원 하나. 동전을 집는 손끝이 흔들려 오백 원짜리가 트레이에서 한 번 튀었다. 쟁그랑, 하는 소리가 새벽의 편의점에 크게 울렸다. 나는 그것을 다시 집어 지폐 위에 올렸다.

“오천오백 원 받으세요.”

김 사장은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도시락만 집어 들고 돌아섰다.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 새벽 거리로 그의 등이 사라졌다. 점퍼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 채 굽은 등이었다. 브리지 미팅이 깨지던 날, 유리문에 비친 내 등이 저랬다. 나는 그 각도를 알아보고 말았다.

트레이 안에 오천 원 지폐와 동전 몇 개가 그대로 남았다. 형광등 빛을 받아 오백 원짜리 테두리가 조용히 반짝였다. 고발할 겁니까, 하고 묻지 못한 말이 입안에 남았다. 물어봤어야 했나. 아니면 이미 답을 들은 건가. 나는 그 돈을 한동안 집지 못하고 내려다보았다. 폐기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진열장 어딘가에서 짧게 울렸고, 나는 그것을 끄러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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