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1화 / 전 33화8

3부 영(零)의 방

21화. 지워지지 않은 로그의 자리

서지운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침이었다. 방은 아직 어둡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렸다. 나는 눕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민혁의 문자를 다시 열었다. 두 달째 지우지 않은 채 대화 목록 맨 위에 걸려 있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화면을 멈췄다. 너는 로그를 지우려고만 했어. 그 아래, 내 답이 들어가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커서가 그 흰 칸에서 깜빡였다.

미안하다, 라고 썼다. 다섯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다 지웠다. 네 말이 맞았다, 라고 다시 썼다. 마침표까지 찍었다가 그것도 지웠다. 손끝이 자판 위에서 멈췄다. 무슨 말을 골라도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이런 밤을 만든 적이 없었다. 민혁과 부딪힌 다음 날이면 나는 늘 다른 걸 보냈다. 스톡옵션 조정안, 팀 회식비, 어깨를 치는 손.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대신 통장에 숫자를 얹었고, 그러면 갈등은 정산이 끝난 항목처럼 목록에서 사라졌다. 이제 얹을 것이 하나도 없어지고서야, 나는 처음으로 말을 고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줄 게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겨우 말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화면을 껐다. 검은 유리에 내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창밖으로는 지나는 이의 신발 밑창만 몇 개 스치고 사라졌다. 아침 여덟 시, 세상은 반 층 위에서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초인종이 없는 방이라, 누군가 온다는 건 늘 노크로 시작됐다.

문을 여니 준영이 서 있었다. 레이어드 막내 개발자. 스물여섯, 회사에서 가장 어렸던 애였다. 열두 계단을 내려온 얼굴이 숨을 조금 몰아쉬었다.

“대표님, 여기 찾느라 편의점 세 군데 물어봤어요.”

대표님, 이라는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 호칭은 이제 어디에도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제 그렇게 안 불러도 돼.”

준영이 웃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대답할 말이 없어 나는 문틀만 붙잡고 있었다. 준영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손아귀가 생각보다 셌다.

“국밥 사드릴게요. 저 첫 월급, 대표님이 손에 쥐여주셨잖아요. 봉투에.”

그런 걸 기억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얻어먹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애의 손을 뿌리치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골목 끝 순댓국집은 아침부터 뜨끈한 김을 뿜고 있었다. 준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뚝배기 두 개를 시켰다. 반찬이 깔리자 깍두기 종지를 내 앞으로 쓱 밀었다.

“이 집 깍두기가 잘 익었어요. 국밥 나오기 전에 하나 드세요.”

뚝배기가 나왔다. 국물 위로 김이 올라와 준영의 얼굴을 잠깐 가렸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그 김만 보고 있었다.

“코드 멈춘 거, 봤어요.” 준영이 말했다. “민혁 선배가 정리해두고 나간 결제 모듈. 자정 지나서 딱 멈추더라고요. 마지막까지 로그가 깨끗했어요.”

로그, 라는 말에 나는 숟가락을 놓았다. 아침에 지웠다 썼다 하던 답장이 목 아래에서 걸렸다.

“다들 나 원망하지.” 국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준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을 종지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깐 창밖을 봤다.

“원망하는 사람도 있죠.” 그 애가 말했다. “월급 밀리고 마음 상해서 나간 사람들 있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고는 나를 다시 봤다. “근데 저는 대표님이 새벽에 저 택시 태워 보내주던 거 기억해요. 야근하고 지하철 끊기면, 카드 주면서 조심히 들어가라고. 그거 회사 돈 아니고 대표님 개인 카드였잖아요.”

나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밸류에이션과 런웨이 말고는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 택시 몇 번쯤은 목록에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지 않았기에 잊었고, 잊었기에 지운 줄 알았다. 그런데 지운 자리에 그 애가 그걸 그대로 들고 있었다.

목이 막혔다. 국물을 한 술 떴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뚝배기 가장자리에 숟가락을 걸쳐두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 준영은 못 본 척 깍두기를 씹었다. 오도독, 하는 소리가 좁은 가게 안에 유난히 크게 났다.

파산 서류의 채권자 목록에는 내가 진 빚이 원 단위까지 적혀 있었다. 7억 2천. 나는 그 숫자를 며칠 밤 들여다봤다. 그런데 그 목록 어디에도 준영의 택시비는 없었고, 지금 그 애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도 없었다.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들은 장부 바깥에 있었다. 내가 여태 한 번도 세지 않은 자리에.

“천천히 드세요.” 준영이 말했다. “국물 식으면 맛없어요.”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준영은 지하철역 앞에서 인사했다. 다음엔 자기가 아는 다른 국밥집에 가자고, 거기가 더 낫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방에 들어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냉장고 소리가 여전히 낮게 깔려 있었다. 민혁의 문자를 열었다. 너는 로그를 지우려고만 했어. 그 문장 아래, 여전히 비어 있는 칸에 커서가 깜빡였다.

미안하다도, 네 말이 맞았다도 아니었다. 아침 내내 못 찾던 말이 국밥 한 그릇 먹고 나니 짧게 왔다.

네 로그, 아직 읽고 있어.

나는 그 짧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지울 말이 없었다.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누르지는 않았다. 그저 오래, 그 위에 손끝을 얹은 채로 있었다. 화면의 불빛이 손톱 밑을 파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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