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零)의 방
20화. 두 시의 온도
“던힐은 12번, 말보로는 7번.”
혼자 소리 내어 외웠다. 편의점 야간 사흘째, 새벽 한 시가 넘으면 손님이 뚝 끊겼고 나는 담배 진열장 앞에 서서 번호를 익혔다.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순서대로 세는 일이 아직도 나를 붙들어 준다는 게 우스웠다. 파산 신청서의 채무자 칸에 이름을 적고 나서도, 나는 무언가를 세지 않으면 손이 허전했다. 숫자에는 끝이 있었다. 12번, 13번, 그다음. 사람의 얼굴에는 그런 끝이 없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들어오고, 익숙한 뒷목이 먼저 보였다.
오세훈이었다.
창업 첫해에 나와 함께 물류 창고에서 라면 박스를 쌓던 첫 직원. 스프레드시트 첫 줄에 내가 제일 먼저 적어 넣은 이름. 나는 계산대 아래로 손을 숨겼다. 도망칠 데가 없어서 그냥 굳었다. 담배 번호를 세던 입이 그대로 붙어버렸다.
세훈이 냉장 코너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집어 카운터로 왔다. 나를 보더니 걸음이 잠깐 멈췄다.
“대표님?”
대표님, 이라는 말이 칼처럼 들어왔다. 나는 대표가 아니었다. 회사도 유리벽도 없었다. 그런데 그 호칭은 내가 무너뜨린 것들을 한꺼번에 이 계산대 위로 끌어다 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삼각김밥 바코드를 찍었다. 삑, 소리가 유난히 컸다.
“여기서 일하세요?”
“어.”
겨우 한 글자였다. 봉투를 건네는 손이 떨리지 않게 하려고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세훈이 봉투를 받아 들고는 진열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대표님, 폐기 도시락은 두 시 이후가 맛있어요. 데워서 김만 뜯어 얹으면 돼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를 쳐다봤다. 폐기 도시락. 두 시. 김. 낯선 세계의 문장 같았다.
“저도 여기서 두 달 했었거든요. 회사 나오고.”
회사 나오고.
내가 밀어낸 사람이, 내가 이름을 제일 먼저 지운 사람이, 나보다 먼저 이 계산대를 지켰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가 이 자리에 서서 폐기 시간을 외우고 삼각김밥 바코드를 찍는 동안, 나는 성수동 유리벽 안에서 마케팅 예산을 두 배로 늘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명치에서 올라왔다. 그 부끄러움 아래에, 이상하게도 안도 비슷한 것이 얇게 깔렸다. 여기 누가 먼저 있었다는 것. 이 새벽이 나만의 밑바닥은 아니라는 것.
세훈은 나가지 않았다. 온장고 옆 창가 테이블에 앉아 봉지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온수기 앞에서 물을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뚜껑을 반쯤 깠다. 손님 없는 새벽의 정적 속에서 나는 그를 훔쳐봤다.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그 말이 또 숫자로 나올까 봐 무서웠다. 예전의 나라면 위로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봉투를 밀었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자리에 금액을 놓았을 것이다. 지금은 봉투에 넣을 것이 없었다. 통장에는 0이 찍혀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돈이 아닌 것으로 사람 앞에 서야 했다.
카운터를 나와 그의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떨어진 데서 멈췄다.
“그때,” 내가 입을 뗐다.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어.”
세훈은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면을 후루룩 삼키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대표님, 저 그날 대표님이 제 어깨 두드린 거 기억해요.”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명단을 만들 때 나는 이름을 인건비로만 읽었으니까. 어깨를 두드린 손 같은 건 계산에 없었다.
“숫자였다는 거 알아요. 근데 손은 따뜻했어요.”
나는 카운터 모서리를 짚었던 손에 다시 힘을 줬다. 손은 따뜻했다는 말이 나를 붙들었다. 내가 평생 계산으로만 만졌다고 믿은 관계에, 나도 모르는 온기가 한 자락 들어 있었다는 것. 내가 지운 줄 알았던 자리에 그런 것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건 내가 설계한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간 것이었다.
세훈이 국물까지 비우고 시계를 봤다.
“두 시 넘었네요.”
그가 일어나 진열대로 갔다. 유통기한 스티커가 붙은 도시락 칸에서 하나를 골라 왔다. 제육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걸 받아 계산하려 바코드를 찾았고, 세훈이 손을 저었다.
“폐기는 안 찍어요. 그냥 데우면 돼요.”
그가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도시락을 넣었다. 시간을 맞추는 손이 익숙했다. 두 달치의 익숙함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봤다. 회전판이 돌아가고, 안쪽에 노란 불이 켜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삐, 소리가 날 때까지.
데워진 도시락에서 김이 올라왔다. 세훈이 뚜껑을 벗겨 내 앞에 놓았다.
“김 있어요? 세 번째 칸에.”
나는 김을 뜯어 밥 위에 얹었다. 젓가락을 들었다. 새벽 두 시의 편의점, 폐기 스티커가 붙은 밥 한 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남이 차려 준 밥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회의 핑계도, 송금도, 자리를 뜰 전화도 없었다. 밥은 뜨거웠고 김은 눅눅했고 제육은 좀 짰다. 나는 그걸 천천히 씹었다.
냉장고 속 엄마의 반찬통 두 개가 떠올랐다. 김치통과 멸치볶음 통. 뚜껑은 아직 열지 못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다만 이 도시락은 먹어도 되겠다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허락했다.
세훈이 봉지를 챙겨 일어섰다. 자동문 앞에서 잠깐 돌아봤다.
“대표님, 다음엔 참치마요 데워 드릴게요. 그게 더 나아요.”
문이 닫히고 그의 뒷목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반쯤 먹은 도시락을 앞에 두고 카운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계산대 위의 불빛이 창유리에 번졌다. 그 안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외면했을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잠깐 마주 봤다. 그리고 다시 밥을 떴다.
두 시가 지난 편의점에는 나 혼자였다. 담배 진열장의 번호는 여전히 왼쪽 위부터 12번, 13번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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