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零)의 방
19화. 식은 밥이 있는 지하의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초인종이 없는 방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계단을 세었다. 열두 칸. 구두 굽이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고, 마지막 칸에서 한 박자 멈췄다. 그 멈춤을 나는 알았다. 은수는 문 앞에 서면 늘 한 번 숨을 고르고 손을 들었다.
이혼 서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봉투를 들고 왔을 거라고. 얇고 반듯한 것, 서명할 칸이 표시된 것.
문을 열자 은수가 서 있었다. 손에 든 건 봉투가 아니라 검은 비닐봉지였고, 그 위로 대파의 흰 밑동과 파란 잎이 삐져나와 있었다.
“쌀은 있어?”
그게 첫마디였다. 나는 없다고 하려다 싱크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반 봉지쯤 남은 쌀이 개수대 옆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은수는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여섯 평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 먹어 밑동이 검게 번진 박스, 아직 풀지 않은 캐리어, 지면과 나란히 붙은 창. 은수의 시선이 그것들을 지나 다시 나에게 돌아왔지만, 은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소매를 걷고 쌀 봉지를 집어 들었다.
물소리가 방을 채웠다. 좁아서 금방 찼다. 쌀을 씻는 소리, 물을 따라 버리는 소리, 다시 물을 받는 소리. 나는 그 등을 보고 서 있었다. 왜 왔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물으면 대답을 하고, 대답을 하면 갈 것 같았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은수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도마가 없어서 접시 위에 대파를 놓고 썰었다. 칼이 접시에 닿을 때마다 딱,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당신, 이런 데서 밥은 먹고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생수 두 병과 엄마가 보낸 반찬통 두 개가 있었다. 김치통과 멸치볶음 통. 뚜껑도 열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은수에게 보이기 전에 문을 닫았다. 성수동 서랍에 넣어둔 봉투처럼, 열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에 그 통들이 들어 있었다. 열면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다.
“물 아직 없어.”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은수는 돌아보지 않고 대파를 마저 썰었다.
밥이 안치는 동안 은수가 나를 오래 봤다. 나는 그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무릎 아래만 보였다. 구두, 운동화, 젖은 바짓단. 그들은 이 방이 아래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
“살 빠졌네.”
은수가 말했다. 나는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다 멈췄다. 웃음은 얼굴에 붙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예전엔,” 은수가 냄비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 얼굴을 봐도 자꾸 다른 게 겹쳐 보였어. 밸류에이션, 이번 달 매출, 다음 라운드. 당신이 말하는 동안 나는 그 숫자들을 보고 있었어. 당신 얼굴이 아니라.”
나는 그 말이 비난인지 아닌지 가늠했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그 문장을 받아 어딘가에 정산했을 것이다. 이건 서운함, 이건 사과할 항목. 그런데 지금은 그럴 힘이 없었다. 나는 그냥 창밖의 발들을 보고 있었다.
밥솥이 소리를 냈다. 은수가 뚜껑을 열자 김이 올라왔다. 천장이 낮아서 김은 금방 위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좁은 방이 잠깐 뿌옇게 데워졌다.
우리는 마주 앉았다. 반찬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대파를 넣고 끓인 국 하나, 밥 두 그릇. 상이 없어서 뒤집은 박스 위에 그릇을 놓았다. 팔 년 전, 예약해 둔 식당에서 식어가던 파스타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전화를 받으러 두 번 자리를 떴다. 지금은 걸려올 전화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돈이 사라지니까,”
은수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말했다.
“이제야 네 얼굴이 보인다.”
나는 국을 저었다. 저을 이유도 없는데 저었다.
“기억나? 내가 언젠가 물었잖아. 그 숫자가 없어지면 당신한테 뭐가 남냐고.”
기억났다. 결혼기념일이었다. 나는 상장하면 다 보상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은수의 얼굴을 나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은 걸 세어 보았다. 여섯 평. 붉게 찍힌 잔고.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굽어가는 등. 그게 전부라고 말하려다, 국그릇 너머에 은수가 앉아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대파를 사 온 손, 도마 없이 접시 위에서 썰던 손, 나를 오래 보던 눈. 그것도 남은 것이었다. 숫자로는 한 번도 적힌 적 없는 것이었다.
나는 밥을 떴다. 목이 메어서 한참 씹었다.
“맛있어?”
은수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대답을 미루지 않고 은수를 마주 봤다.
우리는 이혼이라는 말도, 다시 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정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다만 밥이 식어가는 걸 두 사람 다 그냥 두었다. 서로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식은 밥을 끝까지 먹었다.
은수가 그릇을 비우고 나서 물을 마셨다. 창밖으로 발 하나가 지나갔다. 방 안의 김은 이미 다 흩어지고 없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내가 말했다. 은수는 대답 대신 나를 봤다. 그 눈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이번에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