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18화 / 전 33화8

3부 영(零)의 방

18화. 지면과 나란한 창과 빈칸

서지운


박스 세 개 중 맨 아래 것의 밑동이 물을 먹어 검게 번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 눅눅함이 손끝으로 스몄다. 이삿짐 사내가 앞장서서 캐리어 두 개를 들었고, 나는 박스를 안고 뒤를 따랐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열두 칸이었다. 아래로 갈수록 공기가 한 뼘씩 서늘해졌다.

“여기 볕은 아침에만 잠깐 들어와요. 그것도 저 윗집 담이 없을 때 얘기고.”

사내가 방문을 밀며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창은 지면과 나란히 붙어 있었고,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이 지나갔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그 발목들은 아무도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나를 볼 수 없다는 게, 나를 아는 얼굴 하나 이 창 앞을 지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다행이었다. 성수동에서 나는 늘 유리 안쪽에 있었고, 사람들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봤다. 이제 나는 유리 밑에 있었다.

짐을 다 부리자 사내가 손을 털며 나갔다. 문이 닫히고, 여섯 평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나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박스 세 개, 캐리어 두 개. 이게 전부였다.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던 날, 낙찰가가 채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도 나는 계산부터 했다. 잔여 채무, 후순위 배당, 회수 불가. 손가락이 저절로 숫자를 굴렸다. 계산하는 동안만은 내가 아직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통제라는 착각. 그 착각을 놓으면 남는 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자꾸 숫자로 돌아갔다.

밤이 되어 나는 통장을 확인하러 나갔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넣을 돈도 뺄 돈도 없다는 걸 알면서,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골목 끝 편의점 옆 ATM이 파란 형광에 젖어 있었다. 카드를 넣고 잔액 조회를 눌렀다. 기계가 잠깐 검게 깜빡였다. 그리고 흰 바탕에 숫자가 떴다.

0원.

마이너스도 아니었다. 붉은 숫자도 아니었다. 그냥 0이었다. 빚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파산 신청서는 아직 서랍 속 종이일 뿐, 법원에 내지도 못했다. 이자도 밀린 임금도 그대로 어딘가에 붉게 쌓여 가는데, 이 계좌만 마지막 한 푼까지 빠져나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동그라미를 오래 바라봤다. 팔백억이라는 밸류에이션을 무대에서 외치던 입, 런웨이가 여섯 달이면 충분하다던 목소리. 그 모든 숫자의 행렬 끝에 남은 게 이 하나의 동그라미였다. 안이 텅 빈 채로 굴러온 동그라미.

은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결혼기념일이었는지, 그 전이었는지. “그 숫자가 없어지면, 당신한테 뭐가 남아?” 나는 그때 웃었다. 상장하면 다 보여주겠다고 했던 것 같다. 이제 화면이 대신 대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는 그 대답 앞에서 웃지 못했다.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뒤늦게 온 손님이 서 있었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화면 위쪽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다 쓰셨어요?”

나는 카드를 뽑고 물러났다. 그가 내 자리로 들어섰다.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0이 자꾸 따라왔다. 눈꺼풀을 감아도 그 흰 동그라미가 안쪽에 하얗게 떠 있었다. 밝은 화면을 오래 본 뒤의 잔상처럼, 어느 벽을 봐도 거기 0이 겹쳐졌다.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았다.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손이 아는데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앉으니 등이 저절로 앞으로 말렸다. 1998년, 부도 통지서를 앞에 두고 거실 불을 켜지 않던 아버지의 등. 나는 그 등을 평생 경멸했다. 왜 불을 켜지 않느냐고, 왜 저러고 앉아만 있느냐고, 속으로 몇 번이나 욕했다. 이제야 알았다. 불을 켜면 방이 보이고, 방이 보이면 그 방에 앉은 자신이 보인다. 아버지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와 같은 각도로 어둠에 잠겨 있었다.

휴대폰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며 방 한구석이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엄마의 부재중 전화 두 통. 성수동 서랍에 그대로 둔 곗돈 봉투가 떠올랐다. 25년을 부어 만든 3천만 원. 그 돈이면 이 0을 조금은 다른 숫자로 바꿀 수 있다는 계산이 나도 모르게 손끝을 스쳤다. 그 순간 속이 뒤집혔다. 나는 또 사람을 숫자로 만들고 있었다. 엄마의 25년을 상환액으로. 파산 서류가 지울 수 없는 유일한 것을 나는 제일 먼저 지우려 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까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깐 멈췄다.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 상태로는 봉투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다. 아니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울음부터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방바닥에 엎어 놓았다. 오늘도 나는 받지 못하고, 걸지도 못한다. 액정이 바닥을 향한 채로 진동 없는 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통장에도, 방에도, 서랍에도.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감각이 어느 순간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더 잃을 게 없다는 것. 계산할 게 남지 않았다는 것.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숫자들은 전부 잃지 않으려고 붙든 것들이었는데, 그 손을 이제 펼 수 있었다.

0. 나는 눈꺼풀 안쪽에 남은 그 동그라미를 다시 떠올렸다. 처음엔 끝처럼 보였다. 모든 숫자가 죽어서 굴러떨어진 자리. 그런데 오래 보고 있으니 그것은 끝이 아니라 빈칸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래서 무엇이든 적을 수 있는 첫 칸. 나는 벽을 향해 손을 뻗어 스위치를 더듬었다. 딸깍. 형광등이 두어 번 깜빡이다 방을 밝혔다. 물 먹은 박스, 풀지 않은 캐리어, 지면과 나란한 창. 여섯 평이 눈앞에 다 드러났다. 아버지가 끝내 켜지 못한 불을, 나는 켰다. 밝아진 방 안에서 나 자신이 보였고, 이번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는 아직 몰랐다. 엎어둔 휴대폰이 바닥에서 한 번 짧게 울었다. 나는 그것을 뒤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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