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零)의 방
17화. 나간 형광등 아래에서
형광등 하나가 나가 있었다.
법률구조공단 상담실은 그 한 칸만큼 어두웠다. 나머지 형광등은 멀쩡히 켜져 있는데도 방 전체가 눈을 반쯤 감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손을 무릎에 얹었다. 맞은편 남자가 서류 뭉치를 책상 위로 밀어 놓았다. 가슴에 단 명찰에 공익법무관 이경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오래 보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고, 볼펜 뚜껑을 열고, 숫자에 밑줄을 그었다.
“채권 총액 칠억 이천. 담보 없고, 소득도 없으시고.”
나는 그 숫자를 읽으려 했다. 칠억 이천. 반사적으로 뒤에 붙일 단위를 찾았다. 밸류에이션이었다면 뒤에 억이 몇 개 더 붙었을 자리였다. 파티에서 무대에 올라 외쳤던 숫자가 있던 그 자리에, 이제 앞에 마이너스가 붙은 칠억이 앉아 있었다. 같은 자릿수를 세는 습관만 남고 방향이 뒤집혀 있었다.
“솔직히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개인파산 신청하고 면책 받는 게 최선이에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문장을 말하는 사람의 억양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회생은요. 변제 계획 세워서, 몇 년에 걸쳐서라도 갚으면.”
그가 볼펜을 내려놓고 나를 잠깐 보았다.
“서지운 씨, 갚을 소득이 있어야 회생입니다. 지금은 갚을 게 없어요.”
갚을 게 없다. 그 말이 이자율보다 아프게 들어왔다. 갚을 게 없다는 건 내가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11년 전 스무 평 지하실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시작했을 때도 나는 매달 뭔가를 만들어 냈다. 적자였지만 매출이 있었고, 마이너스였지만 곡선이 있었다. 이제 나는 곡선을 그릴 축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신청서 양식을 한 장 꺼내 앞으로 돌려놓았다. 볼펜으로 첫 칸을 짚었다. 채무자, 라고 인쇄된 글자 옆에 빈 줄이 그어져 있었다.
“여기 성함 적으시면 됩니다.”
나는 볼펜을 받아 들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채무자, 그 세 글자 옆에 내 이름을 붙이는 일이 손끝에서 걸렸다. 몇 년 동안 나는 명함을 건넬 때마다 레이어드 대표 서지운, 그 배열을 나 자신이라고 믿었다. 앞의 네 글자가 나를 나로 만든다고 여겼다. 대표라는 두 글자가 떨어지고, 회사 이름이 떨어지고 나면, 남는 건 서지운 세 글자뿐이었다. 그 세 글자만으로는 아무 데도 소속되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이경한이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는 대신 볼펜을 종이에 댔다. 서, 하고 획을 그었다. 지, 운. 마지막 획을 그을 때 종이에 눌린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손이 저절로 눌렸다.
채무자 서지운.
검은 글자 옆으로 형광등 불빛이 번들거렸다. 나는 그 이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경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다른 서류를 정리하며 내가 다 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 배려가 오히려 이상했다. 여기서는 이 자세, 서류 앞에서 자기 이름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의 침묵이 흔한 일인 모양이었다.
문득 열쇠가 떠올랐다. 오는 길에 주머니에서 만졌던, 아버지가 남긴 지하실 열쇠. 밑동에 붉은 인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대보증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손끝에 묻은 붉은 것이 어쩌다 열쇠까지 옮겨 갔고,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붉은 것이 결국 이 종이 위 세 글자까지 흘러 내려온 것 같았다. 도장에서 열쇠로, 열쇠에서 이름으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의 순서였다.
“이제 면책까지 가면, 이 빚은 법적으로 사라집니다.”
이경한이 신청서를 다시 자기 앞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사라진다. 나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칠억 이천이 사라진다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직원들 밀린 임금은요, 하고 물으려다 삼켰다. 임금채권이 최우선 변제라는 것도, 유리 팀장에게 전화로 이미 그렇게 대답했던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정말 묻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어느 순위에도 없는 것에 대해서. 채권으로 접수조차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성수동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온 두툼한 봉투. 엄마가 이십오 년 동안 부은 곗돈. 그건 이 신청서 어디에도 적히지 못할 것이었다. 채권자 목록에 박순임이라는 이름은 오르지 않는다. 엄마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없으니까. 그냥 준 것이니까. 법은 준 것을 세지 않았다.
법적으로 사라지는 것과 법 밖에 남는 것이 있었다. 칠억 이천은 서류 한 장으로 지워질 것이고, 엄마의 봉투는 그 어떤 서류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채무자라는 이름을 새로 입은 채, 지워질 것과 지워지지 않을 것을 나란히 세어 보고 있었다.
“신청서는 검토하시고 다음 기일에 가져오세요.”
이경한이 서류를 봉투에 넣어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가는 길에 나간 형광등 아래를 한 번 더 지났다. 어두운 그 한 칸이 방 안에서 유독 오래 눈에 남았다.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볕이 눈을 찔렀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쥐었다. 여기서 두 시간 거리의 서랍 속에, 아직 열지 않은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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