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零)의 방
16화. 칠억의 숫자와 굽어지는 등
우편함은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었다. 이사 온 지 나흘째, 그 안에 뭔가 들어 있는 걸 처음 봤다. 흰 봉투였다. 붉은 글씨.
내용증명.
나는 계단을 반쯤 내려오다 멈췄다. 손잡이를 쥔 손과 봉투를 쥔 손이 따로 놀았다. 방까지 내려갈 것도 없었다. 계단참에 서서 봉투를 뜯었다. 종이가 얇게 찢기는 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붙었다. 원금, 약정이자, 지연손해금. 항목마다 숫자가 붙어 있었고 맨 아래 굵은 글씨로 합계가 찍혀 있었다.
칠억.
나는 그 숫자를 세 번 다시 읽었다. 밸류에이션 팔백억을 무대에서 외치던 입으로, 이제 나는 이 숫자 앞에 앉게 될 참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때 숫자는 나를 부풀렸고, 지금 숫자는 나를 눌렀다. 봉투를 든 손이 조금 내려앉았다. 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방에 들어와 바닥에 앉았다. 봉투를 무릎에 올려두고 오래 있었다. 반지하 창은 지면과 맞붙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창틀을 지나갔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봉투 위 붉은 글씨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 글씨는 잠깐 흐려졌다가, 빛이 물러나면 다시 선명해졌다.
전화는 다음 날 오전 아홉 시부터 울렸다.
“서지운 씨 본인 되시죠.”
매끄럽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화도 없고 온기도 없는, 매뉴얼을 읽는 목소리.
“채무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중으로 상환 계획 주셔야 합니다.”
없다고 말했다. 정말 없었다.
“잔고가, 0입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게 낯설었다. 상대는 잠깐 말이 없다가 다시 매뉴얼로 돌아갔다.
“그럼 담보로 잡으실 자산이라도.”
없다고 다시 말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른 번호가 떴다. 그다음도, 그다음도. 1668로 시작하는 번호와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번갈아 화면에 올라왔다. 목소리는 조금씩 달랐지만 말은 같았다. 상환 계획, 담보, 오늘 중으로.
오후가 되자 나는 앞자리로 발신처를 구분하고 있었다. 열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스물세 통. 나는 그 통화를 하나씩 세고 있었다. 세다가 손을 멈췄다. 세는 것도 오래된 버릇이었다. 회사가 사라지고, 사무실 유리가 뜯겨 나가고, 통장에서 마지막 숫자가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세고 있었다. 남은 게 세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처럼.
저녁 무렵 낯익은 이름이 떴다. 유리 팀장. 받을까 말까 하다 손가락을 댔다.
“대표님, 저 밀린 임금 관련해서요.”
목소리에 미안함과 날이 같이 있었다.
“파산 절차에서 최우선 변제라고는 들었는데요. 그게 진짜 나오는 거 맞아요?”
나온다고 했다.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변호사에게 들은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임금채권은 우선순위가 높습니다. 그 문장을 남에게 건네자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저는 대표님 원망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잠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진짜 궁금해서요. 대표님은 이제 뭐 먹고 살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물세 통의 독촉 전화가 묻지 않은 것을 그녀가 물었다. 채권자들은 내가 무엇을 갚을지만 물었지, 무엇을 먹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이 하루치 전화를 다 합친 것보다 아팠다. 나는 전화 끊고 밥 챙겨 드세요,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통화를 끝냈다. 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나는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렸다. 진동도 껐다. 화면만 소리 없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액정이 규칙 없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 켤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 어둠이 불편하지 않았다. 어둠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웠다. 등이 저절로 앞으로 말렸다. 1998년의 거실이 이 방보다 넓었는지 좁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서 굽어 있던 등 하나는 정확히 기억났다. 부도 통지서를 받은 밤, 아버지는 불을 켜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등을 오래 미워했다. 왜 불을 안 켜느냐고, 왜 아무 말도 안 하느냐고. 이제 나는 그 방향으로 등이 굽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불을 켜지 않는 게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도.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손안에 쥐었다. 밑동의 인주 자국이 어둠 속에서도 손끝에 잡혔다. 나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서랍에 두고 온 봉투가 떠올랐다. 성수동 책상 서랍, 감원 명단과 파란 사원증 옆에 넣어둔 두툼한 봉투. 엄마가 이십오 년을 부은 곗돈. 나는 그것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머릿속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봉투 안에 얼마가 들어 있을까. 그걸 열면 칠억 중 얼마가 지워질까. 삼천? 오천? 나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엄마의 이십오 년을 원금 상환액으로 환산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가서 나는 멈췄다. 속이 뒤집혔다. 이십오 년을 부은 돈을 아들이 빚의 소수점 아래로 나누고 있었다.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인간은 사랑까지 숫자로 처리한다. 나는 열쇠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에 밑동이 파고들었다.
전화기가 또 소리 없이 밝아졌다. 이번엔 번호가 아니었다.
엄마.
화면에 뜬 두 글자를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받으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는 게 문제였다. 밥은 묵고 댕기냐. 딴 말 말어. 엄마는 빚을 묻지 않을 것이다. 회사를 묻지 않을 것이다. 채권자들이 하루에 스물세 번 물은 것을 엄마는 한 번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게 견딜 수 없었다.
손가락을 대지 못했다. 화면은 한참 밝게 떠 있다가 저 혼자 어두워졌다. 부재중 표시가 하나 더 늘었다. 나는 그것도 세지 않으려고 화면을 뒤집었다.
발목만 지나다니는 창밖이 검은색에서 진한 남색으로, 다시 파란색으로 옅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열쇠는 손바닥에 붉은 자국 하나를 눌러놓고 그대로였고, 서랍 속 봉투는 여기서 두 시간 거리의 어둠 속에 그대로 있었다. 아직 열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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