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零)의 방
15화. 유리가 사라진 방의 볕
테이프를 누르는 손끝에서 끽, 하는 소리가 났다. 유리문은 차가웠고, 아침 여덟 시의 성수동은 아직 깨지 않았다. 나는 A4 한 장을 유리에 붙이고 네 귀를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폐업 공고. 그 아래 회사 이름과 날짜가 인쇄되어 있었다. 붙이고 나니 종이는 안쪽에서 보면 글자가 뒤집혀 읽혔다. 밖을 향해 붙인 문장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아홉 시에 인부 넷이 왔다. 반장이라는 사람이 도면을 펼쳐 유리문에 대보더니 손가락으로 벽을 훑었다.
“여기 통유리부터 뜯습니다.”
무심한 말이었다. 그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투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처럼 곧장 일로 들어갔다. 나머지 셋이 흡착판과 공구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회색 소파에 앉았다. 며칠 동안 잠을 잔 그 소파였다. 앉아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첫 장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흡착판이 유리에 달라붙을 때 쪽, 하는 진공 소리가 났고 그다음은 조용했다. 두 사람이 유리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그 벽이었다. 시리즈B 파티 밤에 샴페인 잔들이 부딪히던 벽. 팔백억이라는 숫자가 프로젝터 빛을 타고 흘렀던 벽. 그 위로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비쳤던 벽. 지금은 그냥 큰 유리 한 장이었고, 두 남자의 팔뚝에 들려 나갔다.
유리가 빠진 자리로 바람이 들어왔다. 막을 것이 없으니 성수동의 소음이 그대로 밀려들었다. 배달 오토바이, 공사장, 누군가의 웃음소리.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사라진 방은 방이 아니었다.
반장이 안쪽 벽으로 걸어가 아크릴 간판을 손으로 잡아보았다.
“사장님, 저 로고는 어떻게 할까요.”
레이어드. 흰 벽에 박혀 있던 글자였다. 창업 3년 차에 디자이너가 며칠 밤을 새워 만든 서체였다.
“떼서 버려 주세요.”
반장이 잠깐 나를 봤다.
“가져가실 것도 아니고?”
나는 고개만 저었다. 가져갈 곳이 없었다. 언니 집에 있는 은수에게 그걸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순천 엄마 집 마루에 그 아크릴 판을 세워둘 수도 없었다. 반지하 원룸에는 그것을 붙일 벽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로고는 회사가 있을 때만 로고였다. 회사가 없으면 그건 떼어낼 쓰레기였다.
정 이사가 열한 시쯤 왔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세우며 들어왔다. 손에는 서류 봉투가 있었다.
“직원들 밀린 임금은 파산 절차에서 최우선 변제로 처리됩니다. 순위가 있어요.”
여전히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그게 지금은 고마웠다.
“유리 팀장한테는요.”
“이미 통보했어요. 서 대표가 안 할 것 같아서.”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곱씹었다. 안 할 것 같아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세훈에게 통보하던 날 이후로, 나는 남은 명단의 이름들을 두 번 접어 서랍에 처박아둔 채 한 번도 다시 펴지 못했다. 마지막 통보마저 내 손을 떠났다. 대표라는 자리가 하는 일을 나는 하나씩 놓치고 있었고, 그 자리가 없어지자 놓친 것도 사라졌다.
정 이사가 돌아가고, 나는 서버 생각을 했다. 강민혁이 정리해두고 간 결제 모듈은 어제 자정에 멈췄다. 남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그가 커밋 메시지에 적어둔 문장이었다. 그 코드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코드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남기고 간 것이, 아무도 쓸 수 없는 것으로 바뀌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오후 세 시, 벽이 다 뜯긴 사무실은 콘크리트 상자였다. 천장에서 전선이 늘어져 있고, 바닥에는 흡착판 자국과 유리 가루가 남았다. 나는 책상으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거기 다 있었다. 접힌 감원 명단, 강민혁의 파란 사원증, 뜯지 않은 엄마의 곗돈 봉투. 그리고 아버지의 지하실 열쇠. 나는 그것들을 오래 봤다. 명단은 내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었다. 사원증은 내가 답장하지 못한 사람의 것이었다. 봉투는 내가 받는 법을 몰라 서랍에 밀어둔 것이었다. 하나도 내 것이 아니었다. 전부 내가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일들이 모여 있는 서랍이었다.
나는 열쇠 하나만 집었다. 밑동에 번진 인주 자국이 손끝에 닿았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자국. 아버지가 지하실을 잠그던 손과, 내가 보증 서류에 도장을 찍던 손이 그 작은 쇠붙이 안에서 만났다. 나머지는 서랍에 그대로 두고 밀어 닫았다. 봉투를 여기 두고 가는 게 마지막까지 미룬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날도 열지 못했다.
일어서서 방을 돌아봤다. 유리가 사라진 자리로 오후 볕이 바닥 끝까지 길게 들어와 있었다. 11년 전 그 스무 평 지하실에는 볕이 없었다. 창이라고는 환기구 하나뿐이었고, 강민혁과 나는 컵라면을 후후 불며 화면 불빛으로 얼굴을 밝혔다. 그때는 볕이 없었는데 곁에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볕이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데, 방에는 나 혼자였다.
반장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짐은 없으세요?”
나는 주머니 속 열쇠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없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가 먼저 그렇게 말했다. 위로 같지 않은 말이라 오히려 견딜 만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빗자루가 유리 조각을 쓸어 담는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방금까지 벽이었던 것들이 쓰레받기 안으로 모였다.
건물을 나서는데 열쇠는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예전처럼 그것을 손안에서 굴려 데우려 하지 않았다. 데워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 알았고, 데운다고 무엇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열쇠를 쥔 채 큰길로 걸었다. 뒤에 두고 온 서랍 속 봉투가 자꾸 발목을 잡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직 열어야 할 것이 하나 남아 있다는 사실만 주머니 속 쇠붙이처럼 차갑게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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