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런웨이의 끝
14화. 붉은 인주 자국과 꺼진 화면
“레이어드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리텐션이.”
거기서 멈췄다. 다음 숫자가 오지 않았다. 십일 년 동안 수천 번 외운 문장이었다. 자다 깨워도 나오던 숫자였다. 그런데 입천장 어딘가에 걸려서, 아무리 밀어도 넘어오지 않았다.
여의도 그 회의실은 조명이 유난히 밝았다. 노트북 케이블을 프로젝터에 꽂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고 케이블을 필요 이상으로 꽉 쥐었다. 맞은편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고, 가운데 심사역은 내 데크를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다. 슬라이드를 넘길수록 그의 펜은 점점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유리컵이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회의실에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서 컵을 도로 내려놓았다. 예전 같으면 이 정적을 내가 먼저 깨고 들어갔을 것이다. 농담을 던지고, 다음 라운드 이야기로 판을 키우고, 그들이 웃는 사이에 숫자를 밀어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술이 오늘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심사역이 펜을 내려놓았다.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CTO 공석에, 지난달 그 기사들에, 저희 IR팀도 부담스러워합니다.”
나는 준비한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더 큰 라운드로 증명하겠다. 그 문장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게 바로 한 달 전 나를 오만하다고 찍어낸 그 문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방패라 믿고 휘두른 말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삼켰다.
“런웨이가.”
이번엔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심사역이 자료를 덮었다.
“이번 건은 저희가 넘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블을 뽑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자에 두 번 헛손질을 했다. 세 번째에 겨우 뽑혀 나왔고, 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지도 못한 채 옆구리에 끼고 회의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십일 년 동안 이 거리에서 나는 늘 이기고 나갔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성수동에 돌아오니 밤 아홉 시였다. 사무실은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남은 자리들은 이미 비어 있었고, 개발자들이 쓰던 모니터에는 화면보호기만 조용히 흘렀다. 유리 팀장이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나를 한 번 봤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올까 말까 하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표님, 내일 얘기 좀 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았다. 밀린 월급, 남은 계좌, 그리고 자기 이름이 어느 명단에 올라 있는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유리 팀장이 나가고,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빈 사무실 안에서 오래 울렸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정 이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의도 결렬.
보내고 나니 손안이 텅 비었다. 답은 오래 오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열어 대시보드를 띄웠다. 서버비, 결제대행 수수료, 남은 넷의 급여. 익숙한 항목들이 익숙한 자리에 있었다. 그 아래로, 민혁이 떠나며 정리해 올린 결제 모듈이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트래픽 그래프가 낮게, 그러나 끊기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그가 마지막에 남긴 커밋 메시지였다. 나는 그 남은 사람들을 이제 내 손으로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밤 열한 시, 새 문서를 열었다.
그동안 레이어드를 이용해 주신.
거기까지 쓰고 커서가 멈췄다. 흰 화면 위에서 커서만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나는 그 깜빡임을 오래 봤다. 화면이 켰다 껐다를 반복하는 아주 작은 심장 같았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랍을 열었다.
감원 명단이 두 번 접힌 채 맨 위에 있었다. 그 밑에 민혁의 파란 끈 사원증. 그 밑에 아버지가 물려준 첫 사무실 지하실 열쇠. 그리고 봉해진 채 그대로인 엄마의 봉투. 나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밑동에 붉은 인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연대보증란에 도장을 찍던 날 손끝에서 옮겨 붙은 자국이었다. 엄지로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흐려지기는커녕 손끝만 붉어졌다. 이건 지워지는 종류의 얼룩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앉아 있으니, 1998년의 거실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부도 통지서를 받던 밤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 저 사람은 왜 불도 안 켜고 저러고 앉아 있나 생각했다. 초라해서라고, 겁이 나서라고, 오래 그렇게만 믿었다. 그때 아버지가 왜 불을 켜지 못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불을 켜면 방 안의 모든 것이 보인다. 팔아야 할 것들, 나눠야 할 것들, 갚아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다 보인다. 그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처럼.
나는 지금 나 자신이 그 굽은 등의 각도로 앉아 있다는 걸 문득 느꼈다.
문서로 돌아왔다. 종료일을 적을 칸에서 커서가 다시 깜빡였다. 날짜를 쳤다. 지웠다. 다시 쳤다. 서비스를 언제 내릴 것인가. 그게 오늘 저녁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나는 날짜를 확정하려다가, 손을 멈췄다.
결제 서버를 내린다는 건 단순히 화면 하나가 꺼지는 게 아니었다. 지난주에도 사람들이 우리 앱에서 물건을 샀다. 그 물건들의 정산이 아직 돌고 있었다. 판매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 결제 대행사와 맞춰야 할 장부, 취소와 환불이 걸려 있는 주문들. 서버를 내리면 그 흐름이 그 자리에서 멈춘다. 멈춘다는 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몫으로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계산했다. 종료일을 하루 당길 때마다, 하루 미룰 때마다 정산 잔액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서버비를 하루 더 내는 것과 미정산 채무가 하루 더 쌓이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무거운지. 스프레드시트를 새 시트에 열고 셀을 채웠다.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십일 년 동안 이 손은 숫자로 답을 찾아왔으니까.
그런데 셀을 다 채우고 합계를 눌렀을 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짜를 넣어도 결과는 같았다. 이건 언제 종료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종료된 것을 언제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 계산이 끝난 자리에 남은 숫자가 없었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를 닫았다. 다시 흰 문서 창이 떠올랐다. 그동안 레이어드를 이용해 주신, 이라는 반 토막 문장 아래에서 커서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종료일 칸에 손을 올렸다가, 결국 아무 날짜도 치지 못했다.
빈 칸에서 커서가 켜졌다 꺼졌다 했다. 나는 그 작은 빛을 오래 바라봤다. 지금 저기에 어떤 날짜를 적든, 그건 우리가 팔았던 마지막 것들의 값을 내가 갚아야 할 목록에 옮겨 적는 일이었다. 손끝의 붉은 자국이 키보드 위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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