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런웨이의 끝
13화. 옥색 보자기와 식어가는 볕
“지운아, 나 순천서 첫차 탔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먼저 밀려들었다. 유리 팀장이 로비 인터폰을 그대로 내 자리로 넘긴 참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뗐다.
“니 얼굴 잠깐만 보고 갈랑게. 오래 안 있어.”
“엄마, 나 지금 회의 중이야.”
회의는 없었다. 회의실 유리문 너머 자리들은 절반이 비어 있었고, 남은 넷은 각자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는 회색 소파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사흘 밤을 무릎 접고 잔 자리였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등이 한 번에 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조금 굽은 채로 앉아 있었고, 그걸 펴려고 어깨를 뒤로 젖히자 셔츠 안쪽에서 뻐근한 것이 걸렸다.
“끝나고 전화할게. 조심히 올라가.”
전화를 끊고 나는 창가로 갔다. 성수동 유리벽 아래, 로비 화분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 검은 몸뻬 차림에 옥색 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목을 빼고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였다. 3층인지 5층인지, 어느 창에 내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엄마는 유리벽 전체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블라인드 줄을 당겼다. 얇은 판들이 아래로 겹쳐 내리며 엄마를 지웠다. 손에 남은 줄의 감촉이 서늘했다. 초라해진 나를 엄마에게 들키는 일이, 그 오후에는 7억보다 무서웠다.
잠시 뒤 유리 팀장이 문을 반쯤 열었다.
“대표님, 어머님 아직 로비에 계신데요. 안 내려가 보세요?”
나는 모니터를 보는 척 스프레드시트의 셀을 아무 데나 클릭했다.
“곧 미팅이라서요. 좀 있다 갈게요.”
그녀는 문고리를 쥔 채 잠깐 나를 봤다. 그 눈이 어젯밤 내게 던진 물음과 같은 온도였다. 다음 달은 있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
나는 계산을 했다. 오늘 아침 다섯 계좌로 흩어진 돈, 다음 주에 빠질 대출 이자, 밀린 임금. 그것들을 빼고 나면 내 개인 잔고는 이미 붉은 숫자였다. 나는 엄마의 곗돈을 알고 있었다. 25년, 순천 시장 안 상가 계원들과 매달 부어 온 돈. 명절마다 그 통장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걸 지금 엄마가 내밀면, 그리고 내가 받으면, 나는 받는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 같았다. 무너지는 걸 엄마 앞에서 보이느니 문을 닫는 편이 나았다.
로비 카메라 화면은 열지 않았다. 엄마가 언제 발길을 돌리는지, 몇 시까지 화분 옆에 서 있는지,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모니터 구석에 카메라 앱 아이콘이 있었고, 나는 그 위로 커서를 가져갔다가 다시 스프레드시트로 돌아왔다. 저녁 내내 그렇게 했다.
밤 열한 시가 넘어 나는 담배 때문에 일 층으로 내려왔다. 관악 원룸엔 온기가 없어 요즘은 소파가 침대였다. 자정 전 마지막 담배 한 대만 편의점에서 사 올 생각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데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화분과 벽 사이 틈이었다. 옥색 보자기가 거기 놓여 있었다. 오후 세 시부터 열한 시까지, 여덟 시간을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 매듭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인적 없는 성수동 거리에 가로등만 켜져 있었다. 엄마는 없었다. 매듭 위에 종이 한 장이 눌려 있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쓴 글씨였다.
“밥은 묵고 댕기냐. 딴 말 말어. 반찬 냉장고 꼭 옇어라.”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매듭을 풀었다. 김치통이 나왔다. 마른 멸치볶음 통이 나왔다. 그리고 손 편지 봉투 하나. 봉투는 두툼했고, 겉면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아무 말도 없었다. 어머니 기일에 300을 보내며 송금 메모칸을 비워뒀던 나처럼, 엄마도 봉투 겉에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담배는 사지 않았다. 나는 반찬통 두 개를 한 팔에 안고 봉투는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손끝으로 봉투 두께를 가늠하자 곗돈의 얼마쯤일지 계산이 저절로 됐다. 백몇십, 어쩌면 그보다. 그 계산이 목구멍까지 역하게 올라왔다. 사랑을 쥐고도 나는 금액부터 읽고 있었다.
사무실은 어두웠다. 남은 넷도 이미 퇴근한 뒤였다. 나는 형광등을 반만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서랍을 열었다. 두 번 접어 넣어둔 감원 명단이 거기 있었다. 유리 팀장의 이름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 옆에 민혁이 두고 간 파란 끈 사원증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안쪽에는 아버지가 남긴 지하실 열쇠. 열쇠 밑동엔 연대보증 도장을 찍던 날 옮겨 묻은 인주 자국이 아직 붉게 말라 있었다.
나는 봉투를 그 위에 얹었다. 감원 명단과 사원증과 열쇠 위로, 엄마의 봉투가 포개졌다. 서랍 하나에 내가 갚지 못한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갚아야 할 이자, 갚아야 할 미안함, 그리고 열어보지도 못한 곗돈. 받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은 사랑도 부채로 적는다. 나는 서랍을 닫았다.
김치통 뚜껑을 열었다. 붉은 배추김치 위로 하얀 참깨가 뿌려져 있었다. 순천 마당의 볕 냄새가 났다. 겨우내 김칫독을 묻어두던 그 마당. 나는 뚜껑을 든 채 한참 그 냄새를 맡았다. 밥을 안치지도, 김치를 집지도 않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나는 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책상 위 휴대폰이 한 번 울었다. 엄마였다. 나는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진동이 두 번 더 울리다 멎었다. 김치통에서 올라온 볕 냄새가 형광등 아래 천천히 식어갔고, 나는 서랍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봉투는 그 안에서, 여전히 봉해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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