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32화 / 전 32화14

5부 다시, 여름

32화. 수면 위로 올리는 숨완결

강선우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여름이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 말은 옥상에 남아 있었다. 스무 해 전 이 자리에서 나를 두고 내려가며 남겼던 문장이, 이번엔 손끝에서부터 되살아났다. 손바닥에는 아직 여름이 쥐여준 못의 서늘한 무게가 걸려 있었다. 녹이 앉은 자리마다 살갗에 얕은 냉기가 배겼다.

난간을 내려다봤다. 여름의 고래는 진작 제 모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옆에 있어야 할 두 마리째는 아직 획 두 개뿐이었다. 어젯밤 나란히 앉아 긁어낸 선들은 시멘트 속에서 형태를 얻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미완의 것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게 지난 스무 해 동안의 내 자리처럼 보였다.

나는 못 끝을 페인트 위에 다시 세웠다. 이번에는 미루지 않았다. 손목에 힘을 주자 녹슨 끝이 미색 칠을 밀고 들어갔고, 아래 감춰져 있던 시멘트가 흰 속살을 드러냈다. 낮게 긁히는 소리가 아침 공기 속에 짧게 떨어졌다. 획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어깨가 조금씩 떨렸고, 가루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서두르지 않으려 애썼다. 완벽한 선을 그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끝까지 긋는 것, 오늘의 몫을 내일로 넘기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지느러미가 이어지고 등의 곡선이 여름의 것과 나란히 눕자, 두 마리는 서로를 향해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크기도 방향도 조금씩 어긋났지만, 그 어긋남이 오히려 둘을 붙여 놓았다. 나는 못을 쥔 손을 내리고 한 발 물러섰다. 손끝이 얼얼했다. 스무 살 여름이 열쇠날을 내밀며 “네 것도 새겨”라고 했을 때, 나는 그 한 마디를 새기는 데 이십 년을 썼다.

수평선이 붉어진 건 그때였다. 밤새 검던 물의 가장자리가 데워지듯 밝아왔고, 젖은 난간 위로 첫 볕이 얇게 얹혔다. 두 마리 고래의 등을 따라 빛이 미끄러졌다. 나는 그 너머로 올라오는 해를 바라보며, 어젯밤 여름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가 맨눈으로 진짜 고래를 봤다고 했다.

“근데 있잖아, 물기둥을 이렇게 뿜고, 등을 잠깐 보여줬다가 다시 쑥 들어가더라. 숨 한 번 쉬려고 그 큰 몸이 통째로 올라오는 거야.”

여름은 두 손으로 그 곡선을 허공에 그려 보였다. 고래는 물속에서 살지 못한다. 숨을 쉬려면 반드시 위로 올라와야 한다. 스무 살의 여름이 이 옥상에서 처음 내게 건넸던 말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인 줄도 몰랐다. 이십 년 동안 나는 서랍 맨 밑, 가장 깊은 물속에 나를 가라앉혀 둔 채 살았다. 스물아홉에도 서른셋에도 누군가 내게 여기 없는 것 같다고 말한 건, 내가 숨을 쉬러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월마다 목이 잠기고 미열이 돌던 것도, 그 물밑에서 겨우 참아낸 숨의 흔적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젖은 걸레와 못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어제 아저씨에게 받아 올라온 양동이 옆에 둘을 나란히 두었다.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낮의 열을 품고 있던 사진 봉투는 어젯밤 이미 여름의 손으로 건너갔으니, 안은 비어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건 얇은 안감뿐이었다. 스무 해 동안 그 자리를 눌러오던 무게가 사라진 자리는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편했다. 오른쪽 주머니의 엽서 세 장까지 함께 건네고 나니, 몸이 조금은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해가 수면을 완전히 밀어 올렸다. 나는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밤새 마른 페인트가 손바닥에 까슬하게 닿았다. 그리고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소금기와 밤새 마른 칠 냄새, 그 아래로 아저씨가 굽기 시작한 생선의 기름 냄새가 한꺼번에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가슴이 끝까지 부풀 때까지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오래 참았던 숨을 물 위에서 게워내는 일이 이런 것이겠거니 했다.

계단 아래에서 밥상 차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밥은 묵었나, 치아라 마, 그릇 부딪는 소리에 섞여 아저씨의 목소리가 층계를 타고 왔다. 그 소리는 이십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려가기 전에 나는 계단 창틀의 네 번째 눈금을 떠올렸다. 어제도 긋지 않은 자리였다. 스무 살에 세 개를 파두고 멈춘 그 옆의 빈 칸을, 나는 오늘도 비워두기로 했다. 여름이 구월에 남섬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언젠가 이 옥상에 다시 서는 날의 몫이었다. 사서함 번호가 적힌 종이는 지갑 안쪽, 엽서가 이십 년을 눌려 있던 그 자리에 넣어두었다.

네 번째 금은 이번엔 도망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나는 걸레와 양동이를 챙겨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두 마리 고래가 아침볕 속에 나란히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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