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31화 / 전 32화11

5부 다시, 여름

31화. 새벽 바다의 사서함 번호

강선우


물이 발목을 감았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젖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운동화 두 짝을 한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걸었다. 발밑이 자꾸 무너지는 감각이 스무 해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너 아직도 신발 벗는 거 싫어하는구나.”

여름이 웃었다. 목에 건 카메라가 파도에 젖지 않게 한 손으로 가슴께에 눌러 붙이고 있었다.

“아니, 그게.”

나는 손안의 운동화를 괜히 고쳐 쥐었다. 뒤꿈치가 다 닳은 신발이었다. 이 신발을 신고 언덕을 올라온 게 나흘 전인데, 그 나흘이 스무 해보다 길었다.

“그게 뭐.”

“모래가, 안으로 들어와서.”

“네가 신발을 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

말문이 막혔다. 여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어 내 발치를 한 번 찍었다. 셔터 소리가 파도에 반쯤 먹혔다.

동쪽 하늘이 회색에서 옅은 살구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물가에 닿는 빛이 색을 바꾸는 동안, 우리는 나란히, 그러나 각자의 보폭으로 걸었다. 여름의 걸음은 나보다 반 발쯤 빨랐다. 스무 살에도 그랬다. 나는 그 반 발을 늘 뒤에서 따라갔고, 그때는 그게 배웅이라는 걸 몰랐다.

“뉴질랜드 남섬에 항구 마을이 하나 있어.”

여름이 수평선 쪽으로 턱을 들며 말했다.

“거기선 아침마다 배가 나가. 관광선도 있고 어선도 있고. 운이 좋으면 부두에 서 있어도 고래가 숨 쉬러 올라오는 게 보여. 뿜는 물이 멀리서도 하얗게 서.”

“많이 봤어?”

“세다가 그만뒀어.”

여름이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9월에 다시 들어가. 이번엔 좀 길게 있을 거 같아.”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문장이 이별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스무 살의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말을 삼키고, 삼킨 말을 주머니에 넣고, 그 주머니째 스무 해를 걸어 다녔을 것이다. 나는 이번엔 삼키지 않았다. 다만 붙잡는 말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거기, 편지 같은 거 도착은 하냐.”

여름이 걸음을 멈췄다. 파도 하나가 우리 발등을 지나 뒤로 물러났다.

“너 이십 년 늦게 부치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도 부치겠다는 뜻이었다. 스무 살에 다 써놓고 서랍에 눕혀둔 문장들이 결국 오늘 밤 옥상에서 소리로 나왔고, 이제 남은 건 아직 쓰지 않은 문장들이었다. 그건 미룰 이유가 없었다.

여름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아까 못을 꺼냈던 그 주머니였다. 젖지 않은 안쪽 페이지를 한 장 찢어, 무릎을 굽히고 허벅지에 대고 뭔가를 적었다. 이메일 주소와 남섬 어느 우체국의 사서함 번호였다. 숫자를 또박또박 눌러 쓰는 손끝에 새벽빛이 앉았다.

“이건 진짜야.”

여름이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방명록에 이름 안 쓴 거랑은 다르게.”

나는 왼쪽 주머니에서 빈 사진 봉투를 꺼냈다. 사진은 이미 여름에게 건넸고, 봉투만 남아 있었다. 그 여백에 볼펜으로 내 번호를 눌러 적어 건넸다. 종이를 맞바꾸는 짧은 순간, 스무 해 전 첫차 정류장에서 필름 통 하나만 내 손바닥에 쥐여주고 버스에 오르던 여름의 손이 그 위에 겹쳐 왔다. 그때 우리는 서로 다른 주머니에 각자의 것을 넣고 헤어졌다. 이번엔 같은 것을 나눠 가졌다. 사서함 번호가 적힌 종이는 내 주머니로, 내 번호가 적힌 봉투는 여름의 카메라 가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이제 진짜 아는 사이인 거지?”

여름이 장난처럼 물었다.

“아니, 그게, 아는 사이는 원래였고.”

말이 또 접혔다. 나는 그걸 억지로 펴는 대신 짧게 고쳐 말했다.

“응.”

여름이 웃었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젖은 모래에 우리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고, 밀물이 그걸 뒤에서부터 차례로 지우고 있었다. 여름의 것 하나, 내 것 하나, 다시 여름의 것 하나. 스무 해 전이었다면 저 사라지는 자국이 아팠을 것이다. 지워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으니까.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발등에 닿는 물의 온도가 미지근했다. 자국은 지워져도 다음에 다시 걸으면 되는 거였다. 다시 찍으면 되는 거였다.

해가 수평선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물빛이 한꺼번에 밝아지면서, 여름의 짧은 머리 끝에 붉은 기가 얹혔다. 여름이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어 나를 겨눴다. 스무 해 전 마당에서 인사도 하기 전에 그랬듯이, 오일장 좌판 사이에서 그랬듯이, 어젯밤 옥상에서 그랬듯이.

“이번엔 도망친 얼굴 아니네.”

여름이 파인더 너머로 말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침 바다를 등지고, 젖은 바지를 그대로 두고, 한 손엔 여전히 낡은 운동화를 든 채로 서 있었다. 스무 살에는 렌즈 앞에서 늘 어딘가로 시선을 흘렸다. 그 작은 사각 안에 갇히는 게 무서웠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사각이 나를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 걸 알았다.

셔터 소리가 파도 사이로 한 번, 짧고 분명하게 떨어졌다.

“이건 같이 현상하는 걸로.”

여름이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스무 해 전 정류장에서 다 감긴 필름 통을 쥐여주며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때 그 필름은 내 서랍 맨 밑에서 이십 년을 잤다. 이번 것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걸 알았다. 여름이 9월에 배를 타고 남섬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니면 그 뒤 어느 날에, 우리는 어느 사진관 붉은 등 아래에 나란히 서서 이 아침이 젖은 인화지 위로 떠오르는 걸 지켜볼 것이다.

여름이 카메라를 다시 목에 걸고 물가를 걸어 나갔다. 나는 그 반 발 뒤를 따라 걸으면서, 이번엔 이 뒤가 배웅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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