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다시, 여름
30화. 미완성의 두 획과 비워둔 눈금
못을 쥐었던 손을 무릎에 내려놓자 손끝에 흰 가루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바지에 문지르려다 말았다. 여름은 내 손을 잠깐 보더니, 털어내지도 말라는 듯 남은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미지근해진 맥주를 따는 소리가 옥상 위에서 크게 들렸다. 그 애는 반쯤 마시고 캔을 내 쪽으로 밀었다.
“너 궁금하지. 나 이십 년 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아니, 그게.”
말은 또 접혔다. 여름은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벗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목에서 카메라가 떠난 그 애의 어깨가 조금 낮아졌다.
여름은 뉴질랜드에서 삼 년을 살았다고 했다. 남섬의 어느 항구 마을에서 겨울을 났고,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찍었다고. 나는 그 애가 말하는 계절을 머릿속으로 뒤집어야 했다. 그쪽 겨울은 이쪽의 여름이라고, 그 애가 먼저 짚어주었다.
“진짜 고래를 처음 봤을 때, 있잖아, 나 셔터를 못 눌렀어.”
여름은 캔을 난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서 폈다.
“물 위로 등이 올라오는데, 그게 생각보다 느려. 검은 게 천천히 밀려 올라와서,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내려가. 나 그걸 그냥 봤어. 렌즈 뒤에 안 숨고. 처음으로 맨눈으로.”
나는 대답 대신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스무 살의 어느 밤, 이 옥상에서 그 애가 수평선을 보며 했던 말이 목 안에서 되살아났다. 고래는 숨을 쉬려고 올라온다는 말. 사람도 그렇다던 말. 그 목소리가 지금 이 목소리 위로 겹쳐지자 목이 잠겼다. 나는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캔 입구만 손톱으로 긁었다.
그 후로 여름은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했다. 남의 결혼식을 찍고, 낯선 항구의 새벽을 찍고, 이름을 건 사진집을 두 권 냈다고. 두 권 다 팔린 부수는 얼마 안 된다고 그 애는 우스개처럼 덧붙였다. 나는 그 사진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표지에 무엇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삼켰다.
“근데 있잖아.”
여름이 캔을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매년 팔월만 되면 여기가 당겨. 다른 데 다 두고, 딱 여기가.”
그 애는 무릎 위에 놓인 봉투를 손끝으로 눌렀다. 낮의 열이 아직 남은 그 봉투가 어느새 내 왼쪽 주머니에서 그 애의 무릎으로 건너가 있었다. 나는 텅 빈 주머니 자리를 손등으로 짚었다.
“아직 못 들은 말이 있어서. 나 그거 확인하러 온 거였어, 매년.”
말은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삼십 분 전에, 내가 못을 긋기도 전에 소리 내어 말해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떠올리자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스무 해 동안 짊어지고 다닌 것이 종이 봉투 하나의 무게로 그 애의 무릎에 놓여 있었다.
여름이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어스름에 비춰 보았다. 초점 밖으로 번진 파란 난간, 그 앞에 서 있는 스무 살의 내 옆얼굴이었다.
“너 기억나? 첫날 유리창 닦다가 나 몰래 훔쳐본 거.”
여름이 못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훔쳐본 거 아니야. 빨래가 무거워서 그쪽을 봤을 뿐이지.”
“거짓말. 도망 온 얼굴이었잖아, 너.”
그 애는 그때 내 얼굴이 빨래에 반쯤 가려진 게 좋았다고 했다. 지워진 데가 있어서 자꾸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었다고. 나는 그런 이유였느냐고 되묻지 못하고 캔만 기울였다.
우리는 그해 여름을 순서 없이 꺼냈다. 나는 배수구가 역류하던 밤을 먼저 꺼냈다. 고무장갑을 한 짝씩 나눠 끼고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발밑이 흥건한 채로 웃던 밤. 여름은 그 대목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셔터 안 누른 거, 나 후회해.”
“왜 안 눌렀는데.”
“몰라. 그땐 진짜 좋은 건 안 찍고 넘기는 버릇이 있었어. 아까우면 못 찍겠더라고.”
오일장 이야기가 나왔다. 심부름값 잔돈으로 필름 두 통을 사줬을 때 그 애가 처음으로 나를 정면으로 찍었다는 것. 옷을 입은 채 바다로 걸어 들어갔던 밤 이야기도 나왔다. 여름은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킨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물속에서 한 박자 조용했던 그 순간을, 그 애도 세고 있었다고. 붙이다 만 유리창 테이프 이야기가 나올 때는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그때마다 방파제에 파도가 부딪혔고, 그 간격은 스무 해 전과 다르지 않았다.
물탱크가 관을 타고 한 번 더 출렁였을 때, 난간 너머 하늘이 물빛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검은 바다와 검은 하늘 사이에 얇은 회색 선이 그어졌다. 여름이 나를 곁눈으로 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현상하자며. 너 그 말 지키러 안 왔잖아, 이십 년 동안.”
나는 이번엔 말을 접지 않았다.
“이번엔 같이 하자. 그 필름.”
여름은 대답 대신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뷰파인더를 눈에 대는 동안 그 애의 짧은 머리 끝이 새벽바람에 흔들렸다. 스무 살의 그 애는 좋은 것 앞에서 늘 셔터를 아꼈다. 이번엔 아꼈던 손이 망설이지 않았다.
찰칵.
마른 소리가 옥상 위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파도 사이로 사라지는 동안, 오래 가라앉아 있던 것이 제 온도를 찾아 천천히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난간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이 새긴 고래 옆에, 내가 방금 그은 얕은 획 두 개가 회색 속살을 드러낸 채 어스름을 받고 있었다. 아직 고래라고 부르기엔 미완성인 두 획이었다.
“내려가서 자자. 너 눈 빨개.”
여름이 카메라를 다시 목에 걸며 일어섰다.
나는 그 애를 따라 일어서면서, 창틀에 그리지 못하고 비워둔 네 번째 눈금을 떠올렸다. 사흘 전, 그 자리를 오늘 긋지 말고 남겨두기로 했었다. 이제 그 눈금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그 애와 다시 마주 앉는 어느 날에. 나는 그 자리를 아직 비워둔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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