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다시, 여름
29화. 스무 해 뒤에 새긴 획
짧아진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무 살의 여름은 목덜미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녔다. 지금 문 앞에 선 사람은 귀밑에서 머리를 잘랐고, 그 아래로 목이 길게 드러나 있었다.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모양은 그때 것과 달랐지만, 사람이 카메라를 걸치는 방식은 스무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끈을 한 번 손등으로 눌러 자리를 잡는 버릇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든 캔을 어디 내려놓을지 몰라 손에 쥔 채로 서 있었다.
여름은 나를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문턱을 넘어설 때 오른쪽 어깨가 먼저 기울었고,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다. 운동화 밑창이 옥상 바닥의 마른 모래를 밟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내 앞을 지나쳐 난간까지 걸어갔다. 발끝이 콘크리트 턱에 닿을 만큼 가까이 서더니, 한쪽 손을 난간에 올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 손톱만 한 고래가 페인트를 뚫고 나와 있는 그 자리로 시선이 내려갔다. 고개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웃었다.
“너, 여기 서 있을 줄 알았어.”
목소리는 낮아져 있었지만 끝을 올려 던지는 버릇은 남아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게.”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멈췄다. 아니, 그게, 하는 뒤를 흐리면 상대가 알아서 다음을 채워주었고,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로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 소리가 목구멍에서 저절로 미끄러져 나오려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손안의 캔이 미지근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난간 위에 내려놓았다. 알루미늄이 콘크리트에 부딪히며 짧고 둔한 소리를 냈다. 여름이 그 소리를 따라 캔을 한 번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왼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낮의 열이 아직 종이 안쪽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여름의 손에 밀어 넣었다.
“이거, 네가 찍은 거야. 나 몰래.”
여름은 봉투를 받아 들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열까 말까 망설이는 손이 아니라, 봉투의 무게를 재는 손이었다. 이윽고 봉투 입구에 엄지를 넣어 종이를 벌리고, 사진을 한 장씩 꺼냈다. 계단 아래에서 올라온 흐린 불빛이 인화지 표면을 얇게 훑고 지나갔다.
“이건 놀이터.”
여름이 첫 장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미끄럼틀 밑에서 찍었네. 얘, 손 떨렸나 봐. 여기 흔들렸잖아.”
그 애는 자기가 찍은 사진을 남의 것처럼 짚었다. 다음 장에서는 편의점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옥상 물탱크가 반쯤 잘려 나가 있었다.
“이건 왜 이렇게 못 찍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진을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파란 난간이 초점 밖으로 흐려진 컷에서 여름의 손이 멈췄다. 그 앞에 스무 살의 내 옆얼굴이 서 있었다. 내가 웃고 있는 줄도 몰랐던 얼굴이었다. 여름은 그 사진을 다른 장들보다 오래 들고 있었다. 인화지 가장자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현상, 안 한다더니.”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필름째 버렸다고 했잖아. 나한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엽서 세 장을 꺼냈다. 세 번 접힌 자리가 얇게 닳아 종이가 그 선을 따라 저절로 접혀 있었다. 파란 바다 그림 아래, 볼펜으로 지운 문장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비쳤다.
“이건 못 부친 거. 스무 살 때 쓴 거.”
여름이 사진을 봉투에 도로 넣고,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엽서를 그 손 위에 올렸다. 그 애의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받아 쥐는 순간, 접힌 골 사이로 손끝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보였다. 오래 접혀 있던 자리라 종이가 부드럽게 꺾였다. 여름은 엽서를 펴 보지 않았다. 세 장을 포갠 채로 손바닥 안에 감싸 쥐고, 엄지로 접힌 골을 한 번 눌렀다. 볼펜 지운 자국이 손끝에 걸리는지, 거기서 엄지가 잠깐 멈췄다.
“눌러쓴 자국이 남았네.”
그 애가 낮게 말했다.
“지워도 다 보여, 이거.”
파도가 한 번 크게 밀려 올라왔다가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물이 자갈을 훑는 소리가 옥상까지 올라왔다. 그 소리가 다 빠질 때까지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때 바다에서, 삼킨 말이 있어.”
또 한 번 파도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소리가 빠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네가 좋았어. 매일 밤 여기 올라온 거, 다 너 때문이었어. 근데 나는 계속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목이 잠겨왔다. 스무 해 동안 여름마다 목이 잠기던 그 자리가 정확히 다시 잠겼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는 문장을 접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다.
“스무 해가 지나버렸어.”
여름은 한참 나를 봤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키는 얼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마침내 눈앞에서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늘 그러듯이, 빙 돌아가는 법 없이 핵심을 곧바로 찔렀다.
“바보야.”
짧게 웃었는데 웃음 끝이 젖어 있었다.
“나도 그 밤에 네가 말할 줄 알고 기다렸잖아.”
여름이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나는 그게 뭔지 알았다. 스무 해 전 옥상에서 그 애가 내밀었던, 수챗구멍에서 주워 온 휜 못이었다. 그때보다 녹이 더 깊게 앉아 있었다.
여름이 못 끝을 난간에 갖다 댔다. 손톱만 한 고래 옆, 스무 해 동안 아무리 손톱으로 문질러도 아무것도 파이지 않던 그 매끄러운 자리였다. 그 애가 못 끝으로 거기를 톡, 톡, 두 번 두드렸다.
“여기, 아직 자리 비워뒀어.”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이번엔 안 미룰 거지?”
나는 손을 내밀었다. 여름이 못을 내 손바닥 위에 놓았다. 녹슨 쇠가 차가웠다. 스무 해 동안 매년 8월이면 이 옥상에 올라와 이 자리를 확인하고 내려간 사람의 손을 지나온 쇠였다. 그 무게가 손바닥 안에서 낮게 눌렸다.
나는 못을 고쳐 쥐고 난간 앞에 섰다. 못 끝을 매끄러운 페인트 면에 갖다 댔다. 여름이 옆으로 붙어 서서, 카메라 끈을 손등으로 한 번 눌렀다.
“고래 옆에. 너무 크게 하지 말고.”
나는 손목에 힘을 주고 못을 아래로 그었다. 첫 획은 미끄러졌다. 페인트가 단단해서 못 끝이 겉면을 스치기만 하고 지나갔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못 끝을 세워 눌러 그었다. 페인트 아래 시멘트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손끝에 흰 가루가 묻어 떨어졌다.
“소리 좋다.”
여름이 웃었다.
나는 두 번째 획을 그었다. 얕은 홈 안으로 회색 속살이 드러났다. 못을 쥔 손아귀가 저릿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고래 옆에, 고래보다 작은 획 두 개가 파이는 동안, 여름이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셔터 소리가 파도 소리 사이로 짧게 끊어졌다.
“안 도망갔네, 이번엔.”
그 애가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못을 계속 그었다. 물탱크가 자정을 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옥상이었다. 아래에서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졌다. 못 끝이 시멘트를 긁는 소리와 셔터 소리가 번갈아 났다.
멈춰 있던 것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소리를, 나는 그제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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