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28화 / 전 32화9

5부 다시, 여름

28화. 자정을 알리는 물탱크 소리

강선우


열 시가 되기 전에 나는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늘 늦었다. 여름이 먼저 캔을 따놓고, 먼저 난간에 기대고, 먼저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도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맥주 두 캔을 난간 위에 나란히 세웠다. 낮에 걸레로 닦아둔 자리, 여름이 새긴 손톱만 한 고래 바로 옆이었다. 페인트가 매끄럽게 말라 있었다. 나는 그 매끈한 데를 손톱 끝으로 몇 번 문질렀다. 아무것도 파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스무 해 전 내가 비워둔 그대로였다.

왼쪽 주머니에 사진 봉투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세 번 접힌 엽서 세 장이 있었다. 두 물건이 스무 해를 서로 다른 주머니에서 살았는데, 오늘 밤 처음으로 같은 사람의 몸에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나는 양쪽을 번갈아 눌러봤다. 봉투는 낮의 열을 아직 품고 있었고, 종이는 얇고 차가웠다.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갔다. 그 사이에 침묵이 있었다. 나는 그 침묵마다 계단 쪽으로 귀가 돌아가는 걸 어쩌지 못했다.

열한 시가 되자 캔 하나가 미지근해졌다. 손바닥에 맺혔던 물기가 다 말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땄다. 탄산이 짧게 부풀었다가 곧 가라앉았고, 나는 반쯤 마셨다. 남은 한 캔은 그대로 두었다.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바다는 검었다. 등대의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물 위를 쓸고 지나갔다. 마을 쪽에서 개가 한 번 짖고 그쳤다. 그 뒤로는 파도뿐이었다. 나는 캔을 쥔 채 문 쪽을 봤다가, 다시 바다를 봤다가, 또 문 쪽을 봤다. 경첩은 조용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스무 살의 새벽이 올라왔다. 배낭 하나만 멘 여름이 버스 계단을 오르면서 나를 돌아보고 웃었다. 목에 카메라도 없었다. 그날의 여름은 아무것도 목에 걸지 않았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그 말이 파도 소리 사이 침묵에 정확히 끼어들었다. 스무 해 동안 팔월이면 목이 먼저 잠겼다. 열은 그다음이었다. 서울의 빈 방에서, 새로 옮긴 회사의 화장실에서, 나는 이유를 대지 못한 채 미열을 앓았다. 지금 이 옥상에서 그 증상이 그대로 올라왔다. 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캔 표면이 손끝에서 가늘게 울렸다.

이미 늦은 건가.

방명록의 빈 이름 칸이 떠올랐다. 여름은 매년 여기 왔고, 매년 이름을 쓰지 않았다. 올해라고 반드시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사람은 언제고 오기를 그만둘 수 있다. 나처럼 스무 해를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여름처럼 스무 해를 매년 왔다가, 스물한 해째에 그만둘 수도 있었다. 오늘이 그 스물한 해째일 수도 있었다.

창틀의 네 번째 눈금 자리도 떠올랐다. 나는 그걸 오늘 긋지 않고 비워두었다. 그으려면 이 밤이 채워져야 했다. 아직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인화지 한 장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표면이 매끈했다. 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초점 밖으로 흐려진 파란 난간, 그 위의 작은 고래,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스무 살의 내 옆얼굴. 여름이 나 모르게 눌렀던 셔터. 내가 여름을 못 본 척하던 그 시간에, 여름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나는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소리 내어 말을 시작했다가 접었다. 스무 살에도 이렇게 접었다. 하고 싶은 말 앞에서 늘 이 두 마디로 물러섰다. 아니, 그게.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접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다시 한번 되뇌었다. 소리 내어 연습하듯 입을 벌렸다가, 정작 할 말은 아직 여름 앞에서만 나올 것 같아 다물었다. 인화지를 봉투에 도로 넣고, 봉투를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남은 캔의 물기가 난간을 따라 아래로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때 물탱크가 울렸다. 태풍이 지나간 뒤 반밖에 차지 못한 물이, 어딘가에서 낮게 출렁이며 관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였다. 게스트하우스가 자정을 알리는 방식이 그랬다. 스무 살에도 나는 이 소리로 세 시를 알았고, 지금은 이 소리로 자정을 알았다.

소리가 잦아들었다.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경첩이 울었다.

기름이 마른 지 오래된 쇠가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였다. 낮에 내가 그렇게 여닫아도 꿈쩍 않던 문이, 지금은 아주 느리게, 누군가의 손 무게를 그대로 받으며 열리고 있었다. 나는 캔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 안쪽의 어둠에서 계단 아래의 흐린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빛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한 뼘씩 옥상 바닥에 얹혔다.

나는 손톱으로 문질러 매끈해진 그 빈자리 앞에서,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먼저 와 있는 사람이 되어 문 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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