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7화. 빈 자리를 닦는 손
지갑 안쪽에서 종이가 먼저 소리로 나왔다. 가죽 틈에 눌려 있던 것을 손톱으로 밀어내자, 마른 잎을 밟을 때 같은 소리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사흘 남은 밤을 앞둔 오후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그 종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엽서는 세 번 접혀 있었다. 스무 해 동안 같은 자리로만 접혀서, 이제 그 선들은 종이의 무늬가 되어 있었다. 펴는 손끝에서 접힌 골이 저항했다. 나는 억지로 펴지 않고, 골을 따라 천천히 눌러 폈다. 파란 바다 그림 아래, 스무 살의 내 글씨가 있었다. 획이 굵고 성급했다. 지금의 나라면 저렇게 힘주어 쓰지 못한다.
세 번 떨어진 게 너를 설명하진 않아.
그 위로 볼펜 금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지운다고 그은 선이었는데, 선은 글자를 덮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만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려고 입을 벌렸다. 목 안쪽에서 뭔가가 걸렸다. 팔월이면 오던 미열이 오늘도 관자놀이 근처를 낮게 돌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 때도, 서른셋 때도 이 무렵이면 목이 잠기고 열이 올랐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게 어디서 오는지 안다. 입을 다물었다. 문장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방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나는 이 종이를 스무 해 동안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묻고 살았다. 이사 트럭에 짐을 실을 때마다 이 엽서와 필름 통만은 손가방에 따로 넣었고, 새 집 서랍에 넣을 때는 늘 맨 밑이었다. 확인하지 않기 위해 간직한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지금 무릎 위에 펼쳐놓고 있자니, 방 안의 공기가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첫차를 타면 됐다. 아침 다섯 시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버스에 오르면, 사흘 뒤의 옥상도 여름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서울의 빈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밀어두었던 가방을 끌어냈다. 지퍼에 손을 걸었다. 가방 안주머니에는 겨자빛으로 변한 필름 통과, 낮에 사진관에서 받아 온 인화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지퍼의 금속이 손가락 아래에서 차가웠다.
손이 거기서 멈췄다. 스무 살의 그 밤에도 나는 똑같이 움직였다. 재하가 머물던 사흘, 나는 302호 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서 눈만 떴다. 여름이 계단을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두 번, 세 번. 나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뭔가를 지켰다고 믿었다. 옥상에서 여름이 못을 내밀었을 때도 그랬다. 다음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웃으면서 그 말을 남기고 여름은 나보다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 웃음이 지금 지퍼 위의 손등에 얹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퍼에서 손을 뗐다. 가방을 다시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밀어 넣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가방 바닥이 벽에 닿는 둔한 소리가 났다.
대신 창틀로 갔다. 볼펜으로 눌러둔 금이 세 개 파여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사흘 동안 그은 것들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나씩. 그 뒤로는 없었다. 나는 손끝으로 세 개의 홈을 차례로 짚었다. 그리고 그 옆의 매끈한 자리를 눌렀다. 아무것도 파이지 않은 나무의 결이 지문에 걸렸다. 오늘은 긋지 않았다. 사흘 뒤에 그을 자리라고 생각하자, 그 빈 자리가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나는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것을 무서워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무섭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에서 아저씨가 물뿌리개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감나무 그늘이 아저씨의 등에 얼룩을 놓았다. 나는 옥상 청소를 하겠다고 말했다.
“옥상? 손님도 안 올리는데 와.”
아저씨가 물뿌리개를 든 채 나를 잠깐 보았다.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다가 놓쳤다. 손님도 안 올리는 옥상을 왜 닦겠다는 건지, 나 자신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었다.
아저씨는 더 묻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다 안다는 얼굴도, 모른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세면장 쪽으로 걸어가 빗자루와 걸레가 든 양동이를 들고 왔다.
“물은 아껴 써라. 태풍 지나고 물탱크 반밖에 안 찼다.”
양동이를 건네는 손등에 검버섯이 넓게 앉아 있었다. 나는 양동이를 받아 들었다. 아저씨는 돌아서서 다시 화분 쪽으로 갔다. 그 등이, 아무것도 참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등처럼 보였다.
3층 복도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밀자 데워진 공기가 얼굴로 밀려왔다. 파란 난간은 오후 볕을 오래 받아 손을 대면 따뜻할 만큼 데워져 있었다. 나는 난간 끝으로 갔다. 여름이 녹슨 못으로 긁어 새긴 고래가 거기 있었다. 여러 번 덧칠한 페인트가 그 위를 덮었지만, 요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그 자국을 문질렀다. 그 옆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스무 해 전 여름이 못을 내밀며 가리켰던, 내가 다음에라고 미룬 자리였다.
걸레를 물에 적셔 짰다. 아저씨의 말대로 물을 아꼈다. 그 빈 자리부터 닦았다. 페인트에 앉은 소금기와 먼지가 걸레에 옮겨 왔다. 나는 고래 자국을 피해서, 그 옆의 매끈한 페인트를 오래 문질렀다. 여름이 매년 팔월 마지막 밤에 올라왔다 내려갔다는 자리였다. 이름도 적지 않고, 옥상만 올라왔다 내려갔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동안 나는 서울의 빈 방에서 팔월을 앓았다. 여름은 이 난간 앞에 올라와 있었고, 같은 밤 나는 창틀에 금을 그으며 열에 시달렸다.
걸레를 쥔 손이 페인트 위를 오갔다. 이 손은 스무 해 동안 뭔가를 미루는 데 쓰였다. 서랍을 닫고, 필름을 넣어두고, 지퍼를 잠그고. 지금은 그 손이 자리를 닦고 있었다. 미루는 대신 자리를 비워두고 닦아두는 일에.
사흘 뒤 이 자리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로 했다. 걸레를 헹구자 양동이 물이 잿빛으로 흐려졌다. 나는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남은 물로 한 번 더 짰다. 볕은 아직 난간 위에 길게 걸려 있었고, 페인트 아래의 고래는 여전히 숨을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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