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26화 / 전 32화9

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6화. 창틀에 남은 눈금

강선우


“너는 여기 없는 것 같아.”

스물아홉에 만난 사람은 그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을 고르는 사이에 그가 문을 닫았고, 나는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형광등 하나가 나갈 듯 깜박이고 있었다. 302호의 형광등도 오늘 밤 내내 그러고 있었다. 두 번 밝았다가 한 번 어두워지는 리듬을 몇 번쯤 세다가, 나는 세던 것을 멈추고 다른 것을 세기 시작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창틀 위를 보았다. 낮에 올려둔 필름 통이 어둠 속에서 겨우 윤곽만 서 있었다. 저 안에 스무 살의 우리가 감겨 있었고, 이제는 봉투 안에서 인화되어 나와 왼쪽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필름 통을 창틀에서 내리지 못했다. 저것이 내가 지나온 시간의 시작점 같아서, 손끝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거기서부터 셈을 시작했다.

스물한 살 겨울에 입대했다. 훈련소 첫 밤, 관물대에 누워 나는 여름의 편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부치지 못한 엽서 세 장을 떠올렸다. 편지가 올 리 없었다. 나는 주소를 물은 적도, 알려준 적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제대하고 복학했다. 졸업했다. 어느 회사에 들어갔고, 명함에 내 이름 석 자가 박혔다. 손가락이 다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셌다.

서른셋에 만난 사람은 여름이 되면 며칠씩 앓아눕는 나를 오래 지켜보았다. 열이 오르고 목이 잠기는 며칠을, 그는 말없이 죽을 끓여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다 한 번, 젖은 수건을 이마에 얹으며 물었다.

“누구 있었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아니, 그게…”

그게 다였다.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고쳐 얹고 방을 나갔다. 그가 떠날 때 남긴 말은 스물아홉의 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표현만 조금씩 바꿔서,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내게 두고 갔다. 너는 여기 있지 않다고. 나는 어느 여자와도 옷을 입은 채 바다로 걸어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런 밤은 한 번뿐이었고, 나는 그 밤에서 나오지 못한 채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사를 열 번 했다. 도시가 바뀌고 방의 크기가 바뀌고 창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짐을 싸는 손이 제일 먼저 챙긴 건 가방 안주머니의 두 가지였다. 엽서 세 장과 필름 통. 나머지는 버리거나 두고 오면서도 그 둘은 손이 먼저 알았다. 그리고 새집에 짐을 풀 때마다 나는 그 둘을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넣고 나서는 그 서랍을 다시 열지 않았다.

열면 확인될 것 같았다. 그 여름이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필름을 현상하면 텅 빈 컷들이 나올까 봐, 여름이 나를 한 번도 담지 않았을까 봐, 나는 이십 년을 열지 않았다. 열지 않은 채 두면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나는 그 미결정을 안고 열 번을 이사했다.

이상한 건 매년 팔월이었다. 달력이 칠월에서 팔월로 넘어가면, 특별히 아픈 데도 없이 목이 잠기고 미열이 돌았다. 회사에서는 그걸 여름 감기라고 불렀다.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어느 해 팔월엔 회의 중에 물 위로 숨을 쉬러 올라오는 고래 이야기가 아무 이유 없이 떠올라, 자료를 넘기던 손이 멈춘 적도 있었다. 부장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나는 페이지를 잘못 넘겼다고 했다.

그런 순간에도 나는 여름을 현재형으로 떠올린 적이 없었다. 지금 어디서 무얼 찍고 있을까, 하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를 언제나 떠난 사람으로만 두었다. 첫차를 타고 언덕을 내려간 뒷모습으로, 다 감긴 필름 통을 내 손에 쥐여준 손으로. 과거형 안에 그를 넣어두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에는 다음 문장이 필요 없으니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스무 살의 내가 볼펜 끝으로 눌러 파둔 홈 세 개가 창틀에 그대로 있었다. 하루에 하나씩, 여름을 기다린 밤마다 그었던 눈금. 그 옆은 여전히 매끈했다. 어젯밤에도 나는 오늘을 셀 새 눈금을 긋지 못했다. 손끝으로 낡은 홈을 훑었다. 스무 해 전의 요철이 손톱 밑에 얕게 걸렸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멈춰 있던 건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은 나를 두고 잘도 흘렀다. 입대와 제대와 취직과 이별들이 다 그 흐름 위에 있었다. 멈춘 건 나였다. 옥상 난간 앞에서 여름이 못을 내밀었을 때 “다음에”라고 말한 그 자리에서, 나는 한 발짝도 걸어 나온 적이 없었다.

여름은 매년 팔월이면 그 난간으로 돌아와 비워둔 고래 자리를 확인하고 갔다는데, 나는 스무 해 동안 열 개의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도 실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매년 그 자리로 오는 동안, 나는 매년 그 자리에서 팔월을 앓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옥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왼쪽 주머니 속에서 사진 봉투가 뻣뻣하게 만져졌다. 낮에 사진관에서 받아 온 인화지들이, 손바닥의 열에도 눅지 않고 각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 각을 손끝으로 눌러보았다. 여름이 몰래 담아둔 내 옆얼굴들이 그 안에 있었다. 이십 년 동안 나만 몰랐던 여름의 대답이 그 안에 있었다.

팔월의 마지막 밤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형광등이 다시 두 번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나는 이번엔 그 리듬을 세지 않았다. 대신 사흘을 셌다. 사흘 뒤 그 밤에 열릴 옥상 문을, 나는 아직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창틀의 매끈한 자리를 한 번 더 짚었다. 새 눈금은, 아직 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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