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5화. 낡은 방명록과 식은 갈치
“니, 302호 달라 캤을 때부터 알았다.”
아저씨는 방명록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갈치를 뒤집었다.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이 짧게 튀었다. 나는 젓가락을 쥔 손을 상 위에 그대로 둔 채 그 등을 봤다. 백발이 형광등 밑에서 성기게 빛났다.
“그 방을 와 찾겠노. 딴 사람이.”
그가 접시를 내 앞으로 밀며 낮게 웃었다. 무릎을 편 채 상 앞에 다시 앉는 동작이 굼떴다. 스무 해 사이에 이 사람도 늙었다는 게, 그 굼뜬 무릎 하나에 다 들어 있었다.
“아니, 그게……”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되물을 말도, 둘러댈 말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20년 만에 이 마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아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방을 내줄 때 그는 분명 나를 낯선 손님처럼 대했다. 열쇠를 건네는 손도 심상했다. 그런데 그게 다 알면서 모른 척한 손이었다는 걸, 나는 지금에야 알았다.
“밥은 묵고 다니나. 얼굴이 반쪽이다.”
아저씨가 젓가락 끝으로 갈치 배를 갈랐다. 가시를 한 줄로 발라내는 손놀림에 망설임이 없었다. 발라낸 살점 하나를 내 밥 위에 얹어주는데, 그 손이 스무 살의 어느 저녁과 똑같았다. 만실을 치른 다음 날이었나, 배수구가 역류한 밤이었나. 기억은 흐려도 밥 위에 얹히던 살의 무게는 그대로였다. 나는 목이 잠깐 막혔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밥을 크게 떠 넣었다. 짜고 뜨거웠다.
밥을 반쯤 비웠을 때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노트를 툭툭 두드렸다.
“여름이 그 가시나, 8월 마지막 밤마다 온다. 벌써 몇 해째고.”
젓가락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밥그릇 가장자리에 부딪혀 짧은 소리를 냈다. 매년, 이라는 말이 목 안쪽에 밥알처럼 걸렸다.
“니 기다린다 소리는 안 하더라만.”
그는 창밖 어둠을 보며 덧붙였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이 그 무심함 속에 있었다.
“빈 칸에 이름도 안 쓰고, 옥상만 올라갔다 내려온다. 커피 한 잔 안 얻어묵고 간다.”
나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발라진 갈치 살이 하얗게 부서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애가 새기라던 못을, 나란히 두라던 고래 옆 빈자리를, 그 애는 매년 혼자 이 언덕을 올라와 확인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페인트가 몇 번 덧칠되는 동안에도. 내가 서울에서 이사를 열 번 하는 동안에도. 여름마다 이유 없이 며칠씩 앓던 그 날들에도, 이 옥상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파란 난간의 손톱만 한 자국을 손끝으로 짚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 세월 동안 무엇을 봐왔을지 나는 가늠하지 못했다. 배웅 없이 첫차를 타고 떠난 애를, 손도 흔들지 않고 정류장에 서 있던 나를, 그리고 매년 돌아와 이름 칸을 비워두고 내려가던 그 애의 등을. 그는 그 모든 걸 프런트 뒤에서, 밥상머리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참견을 못 참는 사람이 20년 동안 참견하지 않고 그저 봐왔다는 게, 나는 문득 무서웠다.
“올해가 사흘 남았다.”
아저씨가 노트를 덮었다. 표지에 붙은 낡은 고래 스티커가 형광등을 받아 잠깐 번들거렸다. 그가 나를 똑바로 봤다.
“니, 이번에는 우짤 낀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봉투를 눌렀다. 오늘 낮 읍내 사진관에서 찾아온 인화지들이 손끝에서 얇게 휘었다. 그 안에는 내가 모르던 스무 살의 내 옆얼굴이, 여름이 몰래 눌러둔 셔터가, 초점 밖에서 흐려진 파란 페인트 위의 고래가 들어 있었다. 사흘. 스무 해를 미뤄온 문장 하나가 겨우 사흘 앞에 놓여 있었다. 미룰 수 있는 거리도, 도망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다음에, 소리 그만하고.”
아저씨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국그릇을 들고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그 말이 등 뒤로 흘러나왔다.
“치아라 마. 밥이나 다 묵고.”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지는 소리가 났다. 식은 국물을 다시 데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상 위에 남은 갈치 살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기름이 굳어 접시 바닥에 하얗게 엉겨 있었다. 식은 살점을 입에 넣었다. 짜고, 뜨거웠던 것이 이제는 짜고 미지근했다. 그런데도 스무 해 전 맛 그대로였다.
주방에서 국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봉투를 다시 한번 눌렀다. 사흘 뒤의 밤을, 그 밤에 열릴 옥상 문을, 나는 아직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의 결심을, 나는 식은 갈치 한 점을 씹으며 겨우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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