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4화. 빈 이름 칸과 가라앉은 고래
봉투 모서리가 손안에서 눅눅해져 있었다. 사진관을 나와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계속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손바닥의 땀이 인화지에 배어들까 봐 나는 봉투를 옆구리에 붙이고, 다른 손으로 주방 문을 밀었다.
기름 냄새가 먼저 얼굴에 닿았다. 아저씨는 등을 보인 채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고, 프라이팬 위에서 갈치 한 토막이 지글거렸다. 카운터 위 라디오는 볼륨을 낮춘 채 낮게 지지직거렸다. 남해안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다 다시 잡음에 묻혔다.
“아저씨.”
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갈라졌다. 아저씨는 돌아보지 않고 주걱으로 갈치의 등을 눌렀다.
“밥은 묵고 왔나.”
“옛날 방명록, 아직 있어요?”
주걱이 팬 가장자리에서 잠깐 멈췄다. 지글거리는 소리만 그 사이를 메웠다. 아저씨는 불을 줄이고 주걱을 팬 위에 걸쳐 둔 다음,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숙였다. 서랍 여닫는 소리, 무언가를 밀치는 소리, 그 등이 움직이는 몇 초가 이상하게 길었다.
“치아라 마. 오래된 거 봐서 뭐하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저씨는 먼지 앉은 노트 대여섯 권을 카운터 위에 툭 얹었다. 표지마다 연도가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2007, 2009, 2011. 순서도 없이 겹쳐진 그것들 위로 나는 봉투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 노트를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스무 살의 우리가 적힌 페이지를 찾지 않았다. 그 여름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넘기고 싶은 건 그 후의 시간, 내가 없던 자리들이었다.
2010이라 쓰인 표지를 지나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낯선 필체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했다. 하트, 도장, 반쯤 뜯긴 스티커, 누군가 그려 넣은 서툰 갈매기. 바다가 좋았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사장님 밥이 최고. 나는 그 사이를 손끝으로 미끄러지듯 훑으며 날짜만 좇았다. 8월 말. 그 언저리에서 자꾸 손이 느려졌다. 8월 스무하루, 스무여드레, 스무아흐레. 매년 그 즈음에서 나는 이유도 모르고 한 박자씩 멈췄다.
그러다 손이 굳었다.
2016년, 여덟 번째 노트의 뒤쪽 페이지였다. 다른 글씨들 사이에서 그 한 줄만 다른 온도로 떠 있었다. 둥글게 흘려 쓴 글씨. 스무 살 그 여름, 빨래 시트 위에 유성펜으로 방 번호와 내 이름을 적어주던 그 필체 그대로였다. 획의 끝을 안으로 말아 넣는 버릇도, ㄹ을 한 번에 그어 내리는 습관도 스무 해 전과 같았다.
아직도 못 새긴 고래가 있어서 자리 비워둠.
그 밑에는 날짜가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꼬박꼬박 채워 넣은 이름 칸이, 그 자리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옥상 난간의 내 몫처럼,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채.
나는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글자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다. 봉투 안에 든 사진 한 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웃고 있는 내 옆얼굴 뒤로 초점 밖에서 흐려진 파란 난간, 그 위에 손톱만 한 고래, 그리고 고래 옆의 빈자리. 여름은 자기가 새긴 고래 앞에서 웃는 나를 찍었고, 스무 해 뒤 나는 그 고래가 여전히 혼자라는 걸 인화지에서 확인했다.
못 새긴 고래. 그건 내 것이었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버스 계단을 오르며 웃던 그 목소리가 이십 년을 건너와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그때 나는 그 말을 원망처럼 들었다. 지금 이 페이지 위에서 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 여름은 떠난 게 아니었다. 매년 이 자리로 돌아와, 자기가 새긴 고래 옆의 빈 곳을 확인하고, 이름 칸을 비워둔 채 한 줄을 적고 갔던 거였다. 채워지지 않은 걸 확인하러 오는 사람의 걸음으로.
등 뒤에서 접시가 카운터 위에 슬며시 놓였다. 가시를 발라낸 갈치 구이였다. 살이 하얗게 벗겨져 김을 올리고 있었다.
“그 아가씨, 팔월 말이면 온다 아이가.”
아저씨는 그 말을 국 간을 보듯 무심하게 던지고는 다시 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처음 듣는 말인 것처럼 나는 되물으려 했다. 언제요, 매년요, 올해도요. 입 안에서 그 물음들이 한꺼번에 부풀었다.
“아니, 그게……”
말이 접혔다.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방명록이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2016도, 2019도, 2022도, 페이지를 넘길 손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노트 위 마른 잉크를 손끝으로 훑었다. 종이에 밴 글자는 미세하게 도드라져 있어, 여름의 획이 지나간 자리가 손톱 밑에 얕게 걸렸다 풀렸다 했다. 스무 해 동안 어딘가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것이, 그 얕은 요철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숨을 쉬러.
라디오가 다시 지지직거리며 남해안 어쩌고를 반복했다. 나는 노트를 덮지 않았다. 아저씨의 등에 대고, 올해 팔월 마지막이 며칠이냐고,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어야 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그 빈 이름 칸 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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