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3화. 젖은 인화지와 밤의 고래
첫차는 텅 비어 있었다. 운전기사 말고 승객이라곤 나뿐이었고, 버스는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빈 좌석들을 흔들며 덜컹거렸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손안의 필름 통을 쥐고 있었다. 밤새 창틀 위에 세워 두었던 것을,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정류장에서 꺼내 손바닥에 옮겨 쥐었다. 스무 해를 가지고 다니고도 처음 여는 사람처럼 손끝이 축축했다. 통은 겨자빛으로 변해 손안에서 미지근했다.
읍내는 생각보다 작았다. 문 닫은 철물점과 간판만 남은 다방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자 끝에 사진관이 하나 있었다. 중앙사진관. 유리문에 붙은 증명사진 견본들이 오래된 여권 속 얼굴처럼 누렇게 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 머리를 부풀린 신부,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 다들 렌즈 너머 어딘가를 똑같은 각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을 밀었다. 종이 딸랑거렸고, 안쪽에서 신문을 접는 소리가 났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나왔다. 내가 필름 통을 내밀자 그는 그것을 받아 손끝으로 굴려 보았다.
“이거 오래됐네예. 이십 년은 됐겠고마.”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한 박자 늦게 목이 잠겼다.
“네, 아니… 그쯤 됩니다.”
그는 통을 창가 쪽 빛에 비춰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오래된 필름은 색이 다 날아가뿌서 나올랑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함 해봅시더.”
그가 안쪽 암실로 들어가고 커튼이 닫혔다. 나는 벽에 붙은 손님용 나무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낡은 의자였고, 앉으니 앞다리가 짧아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었다. 맞은편 벽에는 낡은 결혼사진 여러 장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흑백에서 색이 도는 것으로, 세로로 긴 것에서 가로로 넓은 것으로, 시대가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세듯이 바라보았다. 아홉, 열, 열하나. 세다가 그만두었다.
커튼 틈으로 현상액 냄새가 새어 나왔다. 시큼하고 축축한 냄새였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 스무 살의 마당을 불러왔다. 여름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볕 속을 걸어 다니던 마당. 시트가 빨랫줄에서 마르며 풍기던 뜨거운 풀 냄새와, 그 사이를 오가던 필름 감는 소리. 여름은 늘 필름을 아꼈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오래 뜸을 들였고, 그러다 안 누르고 카메라를 내리는 날도 많았다. 필름 아까워.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때는 그게 여름의 인색함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뒤 커튼이 젖혀졌다. 주인이 집게로 젖은 인화지 몇 장을 집어 들고 나왔다. 물방울이 바닥에 몇 점 떨어졌다.
“생각보다 잘 나왔네예. 근데 이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보았다.
“손님 다 나온 사진인데?”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인화지를 받아 들었다. 물기 밴 종이가 손끝에서 미끈거렸다. 첫 장에서 스무 살의 내가 걸어 나왔다. 방파제 위에서 눈을 찡그린 나. 바람에 티셔츠가 부풀어 있었고,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다음 장은 감나무 아래였다. 떨어진 감을 밟지 않으려고 어정쩡하게 선 나. 그다음, 옥상이었다.
파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옆으로 웃고 있는 나였다.
나는 그 장을 넘겼다. 또 옥상이었다. 각도만 조금 달랐다. 다시 넘겼다. 또 옥상. 팔을 괸 채 고개를 돌린 나, 캔을 입에 대려다 무슨 말을 하며 웃는 나, 난간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 한 장이 아니었다. 두 장, 세 장, 네 장. 인화지를 넘기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필름의 절반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찍힌 내 옆얼굴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분명히 우리가 번갈아 찍었다고 기억했다. 마지막 주 어느 하루, 여름이 카메라를 내 목에 걸어 주며 오늘은 반씩 나눠 쓰자고 했다. 나는 여름을 찍었고, 여름은 나를 찍었다. 그렇게 한 통이라고 알았다. 그런데 이 컷들은 그날 하루의 것이 아니었다. 옥상 밤의 빛이었다. 여름과 내가 아직 캔을 나눠 마시던, 내가 아직 매일 밤 계단을 밟고 올라가던 밤들의 것이었다. 내가 셔터를 쥔 순간 말고도, 여름은 나를 찍고 있었다.
“괘안습니꺼?”
주인이 물었다. 인화지 귀퉁이가 물기로 흐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떨고 있었다.
“아니, 그게…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찍은 거라서요.”
말끝이 흐려졌다. 주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인화지를 조심스레 내 무릎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의 슬리퍼 소리가 암실 쪽으로 멀어졌다.
옥상 컷 속의 나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정면이 아니라 옆이었다. 렌즈를 보고 웃는 게 아니라, 렌즈 뒤의 여름을 보고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웃음의 방향을 알았다.
스무 해 동안 나는 그 여름을 나 혼자만의 것으로 접어 두고 살았다. 혼자 데운 온도라고 생각했다. 여름은 늘 흘러가는 쪽이었고, 나는 매번 다음에라고 미루는 쪽이었으니, 마음이 있었던 건 나뿐이라고. 확인하면 무너질까 봐 이 필름을 열지 못했다. 열지 않으면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무릎 위에 놓인 절반의 컷들이, 여름도 나를 보고 있었다고 스무 해 늦게 증언하고 있었다. 필름 아까워, 하고 카메라를 내리던 그 뒤편에서. 아직, 하고 셔터를 삼키던 그 옆에서. 여름은 내가 모를 때 나를 담았다.
나는 젖은 사진 한 장을 무릎 위에서 뒤집어 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앞으로 돌렸다. 옥상에서 웃는 내 옆얼굴. 그 뒤로 파란 난간이 초점 밖에서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그 번짐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고래가 있었다.
내 웃는 옆얼굴 뒤, 파란 난간 페인트 위에 손톱만 한 고래가 흐릿하게 함께 찍혀 있었다. 여름이 녹슨 못으로 긁어 새긴 그 고래였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여름이 난간에 고래를 새기던 그 밤 이후의 것이었다. 여름은 자기가 새긴 고래를 배경에 두고, 그 앞에서 웃는 나를 찍었다. 초점은 나에게, 고래는 뒤에.
나는 사진을 무릎에 내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물기가 손가락 사이로 번졌다. 벽에 걸린 결혼사진들이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암실 쪽에서는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고래 아저씨의 밥상이, 방명록이, 창틀 위에 세워 둔 겨자빛 통이 한꺼번에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 물음을 나는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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