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22화 / 전 32화7

4부 스무 해 늦은 답장

22화. 창틀 위에 세워둔 여름

강선우


시계는 없었다. 그래도 세 시라는 걸 알았다. 파도 소리가 가장 멀리 물러나고, 방과 방 사이의 마룻바닥이 제 무게로 한 번씩 우는 시각. 그 시간을 나는 스무 살에 익혀두었다. 익혀두었다는 걸 스무 해 만에 다시 알았다.

창틀에는 금이 세 개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볼펜을 눌러 파둔 자국. 나는 그 세 줄을 손끝으로 마지막까지 훑고 나서야 겨우 그 여름에서 빠져나왔다. 손톱 밑에 떫은 것이 남은 듯했다. 감나무 아래에서 물러진 감을 쥐었던 날의 즙이 스무 해를 건너뛰어 손끝에 도로 밴 것 같았다. 방은 어두웠고,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한 번 폈다 쥐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무릎 위로 가방을 끌어올렸다. 열 번을 이사하는 동안 나는 짐의 팔 할을 버렸다. 책도, 옷도, 한때 나를 설명하던 물건들도 이삿짐센터 사람이 묻기 전에 먼저 내다 버렸다. 그런데 이 가방의 안주머니만은 이사 때마다 마지막에 열어 확인했다. 확인하고 나면 다시 닫았다. 안에 든 것을 꺼내본 적은 없이, 있는지만 손끝으로 세어보고 지퍼를 올리는 일. 나는 그걸 이십 년 동안 반복해왔다.

지퍼를 끝까지 열었다. 필름 통은 거기 있었다. 검은 플라스틱 뚜껑, 코닥의 몸통은 처음의 노랑을 잃고 겨자빛에 가까워져 있었다. 손바닥에 올리니 어이없이 가벼웠다. 이 안에 방파제가 들어 있고, 마당 감나무 아래가 들어 있고, 셔터 소리를 그렇게 아끼던 애가 끝내 나를 향해 한 번 눌러준 컷이 들어 있다.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안에 무엇이 찍혔는지 이십 년을 모른 채로 살았다. 모른 채로 사는 편을 골라왔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현상하자. 그 말이 아직도 왼쪽 손바닥에 얹혀 있었다. 정류장에서 여름이 내 손을 펴고 이 통을 쥐여줄 때, 손바닥에 닿던 플라스틱의 미지근함까지 그대로였다. 약속이라면 지킬 날이 온다고, 그때 나는 믿었다. 믿음이라기보다 유예였다. 나는 뚜껑에 손톱을 걸어 반쯤 밀어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도로 눌러 닫았다. 안으로 빛이 들면 필름이 탄다는 생각이 손보다 먼저 왔다.

우스운 일이었다. 스무 해 전에 이미 다 감긴 필름을, 이제 와 빛으로부터 지키겠다고 뚜껑을 닫는 손. 나는 대체 무엇을 지켜왔나. 여름의 얼굴을 지킨 게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그 여름 한복판을, 아직 뭐든 될 수 있던 그 계절을 통째로 붙들고 있었던 거였다. 통을 열면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든 하나로 확정될 것이다. 웃고 있거나, 웃지 않거나. 나를 오래 봤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나는 확정이 두려워 이십 년을 검은 뚜껑 밖에 세워두었다.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엽서 세 장이 그대로 있었다. 접힌 자리가 닳아 얇아진 종이. 문방구 진열대에서 골랐던 지나치게 파란 바다가 겉면에 있고, 뒷면에는 스무 살의 내 글씨가 있었다. 세 번 떨어진 게 너를 설명하진 않아. 볼펜으로 얇게 그어 지운 그 한 줄까지 나는 통째로 데리고 다녔다. 지우면 안 쓴 게 되는 줄 알았던 나이. 지운 자국이 오히려 문장을 또렷하게 남긴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왼손에 필름 통을, 오른손에 엽서를 나눠 쥐었다. 처음이었다. 스무 해 동안 두 물건은 정류장에서 내가 넣어둔 그대로, 각각 다른 주머니에서 서로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한쪽에는 내가 삼킨 말이 종이가 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우리가 함께 만든 빛이 아직 어둠 속에 감겨 있었다. 필름은 현상되지 않았고 엽서는 부쳐지지 않았다. 둘 다 쓰이기는 했으나 어디에도 닿지 못한 말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필름 통은 점점 차가워졌고, 종이는 손끝에서 자꾸 저 혼자 접혔다.

창밖에서 파도가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낮게 꺼졌다. 옥상에서 여름이 했던 말이 그 소리 위로 떠올랐다. 고래는 숨을 쉬려고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가라앉혀둔 것도 그렇게 한 번씩 등을 보인다. 나는 그 등을 스무 해 동안 못 본 척했다.

일어나 창가로 갔다. 필름 통을 안주머니에 도로 넣으려다, 손이 지퍼 앞에서 멈췄다. 나는 지퍼를 열지 않았다. 대신 창틀로 손을 옮겼다. 금이 세 개 파인 자리, 그 옆의 매끄러운 나무 위에 필름 통을 똑바로 세워 두었다. 검은 뚜껑이 위로, 겨자빛 몸통이 아래로.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게 보였다.

혀 밑으로 세 글자가 올라왔다. 다음에. 나는 그것을 굴리기만 하고 삼키지 않았다. 삼키지도, 뱉지도 않은 채 그냥 창틀 위에 통을 세워둔 것으로 두었다. 처음으로, 다음에 하겠다는 말을 붙이지 않은 채였다.

파도가 다시 올라왔다 내려갔다. 읍내에는 사진관이 아직 한 곳쯤 남아 있을 것이다. 아침이 오면, 나는 이걸 들고 언덕을 내려가게 될까. 창틀 위의 필름 통은 대답하지 않았고, 다만 새벽빛이 조금씩 들어차는 방 안에서 저 혼자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