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21화 / 전 32화8

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21화. 서로 다른 주머니의 스무 해

강선우


새벽 다섯 시의 마당에는 아직 밤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냄새가 고여 있었다. 젖은 흙, 식은 시멘트, 감나무 아래 뭉개진 열매의 떫은 기운. 나는 그 냄새 속을 걸어 나갔다.

여름은 배낭 하나를 메고 서 있었다. 목이 비어 있었다. 두 달 동안 그 목에 늘 걸려 있던 것이 없으니, 여름의 몸이 어딘가 한 뼘쯤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배낭 끈이 왼쪽으로 쏠려 어깨선이 비스듬했다. 나는 그걸 봤다. 손을 뻗어 끈을 바로잡아 주는 데 필요한 건 두 걸음과 반쪽의 용기뿐이었는데, 나는 두 걸음을 걷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종이 모서리가 닿았다. 사흘 전 서랍에서 도로 꺼내 접어 넣은 엽서였다. 파도가 지나치게 파란 그 엽서. 나는 그 모서리를 손톱으로 눌러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짐 그게 다야?”

내 목소리가 마당에 얕게 깔렸다. 여름이 배낭 끈을 한 번 추스르며 웃었다.

“응. 무거우면 못 떠나.”

그 웃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리 끝났다. 나는 그 반 박자를 세었다. 아침마다 밥상 앞에서 나를 놀리던 웃음, 배수구 앞에서 고무장갑을 낀 채 터지던 웃음, 옥상에서 캔을 부딪치며 짓던 웃음. 그 웃음들은 언제나 끝이 길었는데, 오늘 것은 짧았다. 짧아진 만큼의 무게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묻지 못했다.

정류장까지는 십 분이었다. 우리는 그 십 분을 파도 소리로 채웠다. 왼쪽으로 바다가 낮게 뒤척였고, 발밑에서는 밤새 앉은 이슬이 슬리퍼 밑창에 눌려 짧게 미끄러졌다. 나는 몇 번인가 입을 열려고 했다. 가지 마. 세 글자였다. 혀 밑에 그 세 글자를 굴리면 침이 고였고, 침을 삼키면 그 말도 같이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여름은 앞서 걸으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애의 비스듬한 어깨선을 십 분 내내 봤다.

정류장 표지판에는 밤새 소금기가 내려앉아 손끝에 서걱거렸다. 여름은 거기 기대서서 시간표를 짚었다. 검지가 낡은 숫자들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다섯 시 사십 분. 딱 맞겠다.”

딱 맞는다는 말이 싫었다. 나는 언덕 아래를 봤다. 아직 버스는 없었다. 있는 것은 회색으로 밝아 오는 하늘과, 그 아래 검게 웅크린 도로뿐이었다.

“여름아.”

내가 불렀다. 여름이 표지판에서 손을 떼고 나를 봤다. 눈이 나를 정면으로 받았다. 옥상에서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하고 물었을 때의 그 눈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이제 나도 너한테 안 물어볼게, 하던 그 눈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눈이었다. 그냥 나를 받아 두고 기다리는 눈.

“아니, 그게…”

말이 입 안에서 접혔다. 나는 그 접힌 말을 다시 펴지 못했다. 여름은 잠깐 기다렸고, 내가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시선을 도로 언덕 아래로 돌렸다. 기다림이 짧았다. 어쩌면 그 짧음이, 이미 여러 번 기다려 본 사람의 것이라는 걸 나는 그때 몰랐다.

언덕 아래에서 헤드라이트가 올라왔다. 두 개의 빛이 도로의 경사를 따라 흔들리며 커졌다. 여름이 그 빛 쪽으로 반걸음 나섰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손가락으로 내 주먹을 펴더니, 손바닥 위에 작고 단단한 것을 올렸다. 필름 통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서로를 번갈아 찍은, 다 감긴 그 통.

“이건 네가 갖고 있어.”

“왜.”

“다음에 만나면, 같이 현상하자. 뭐 찍혔는지 그때 같이 보게.”

그 원통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이상한 무게를 느꼈다. 필름 한 통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고 깃털처럼 가볍다. 그런데 그게 손바닥을 눌렀다. 두 달 동안 내가 삼킨 말들이, 옥상에서 삼키고 바다에서 삼키고 유리창 너머로 삼킨 말들이, 딱 이만한 부피로 뭉쳐 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삼킨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그만한 무게로 남아 있다가, 이렇게 손바닥 위로 되돌아온다.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섰다. 문이 접히며 열렸다. 매캐한 배기가스가 새벽 공기 속으로 훅 퍼졌다. 여름은 한 발을 계단에 올렸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렸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끝을 붙잡으려 했다. 물음표였나. 마침표였나. 물음표라면 아직 무언가 열려 있는 것이고, 마침표라면 이미 닫힌 것이었다. 나는 분간하지 못했다. 여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머지 발을 올렸다. 문이 다시 접혔다. 유리창 안쪽에서 여름의 얼굴이 잠깐 하얗게 떠올랐다가, 버스가 움직이자 뒤로 흘러갔다.

나는 손을 들지 못했다. 여름도 창 안에서 손을 흔들지 않았다. 재하를 배웅하던 아침에 여름이 렌즈를 들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서 있었다.

버스가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배기가스 냄새가 소금기에 섞여 천천히 흩어졌다. 도로가 다시 비었다. 하늘은 아까보다 조금 더 밝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른손 주머니 안에는 부치지 못한 엽서가 있었고, 왼손 손바닥 위에는 필름 통이 있었다. 한쪽에는 내가 쓴 말이, 한쪽에는 우리가 함께 찍은 빛이. 두 개를 양손에 나눠 쥔 채, 나는 어느 쪽도 건네지 못한 사람으로 남았다. 손바닥 위 필름 통은 새벽 공기를 받아 점점 차가워졌고, 주머니 속 종이는 손끝에서 자꾸 접혔다.

다음에. 나는 그 말을 혀 밑에 다시 굴렸다. 다음에 만나면 같이 현상하자던 그애의 말이 그때는 약속처럼 들렸다. 약속이라면 지킬 날이 온다. 나는 그렇게 믿으면서 필름 통을 주머니에 넣었다. 엽서가 든 쪽 말고, 반대쪽 주머니에.

그 두 개가 스무 해 동안 서로 다른 주머니에 남아 있게 될 줄은, 그날 아침의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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