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20화. 파란 난간 위에 남겨진 고래
“이거 어디서 났게.”
여름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끝이 한쪽으로 살짝 휜 못 하나가 손금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붉은 녹이 얇게 앉아, 그 자리에 손바닥까지 옅게 물들어 있었다.
“세면장 수챗구멍 옆에. 며칠 전부터 봐뒀어.”
나는 그게 뭘 하려는 물건인지 묻지 않았다. 여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난간 쪽으로 갔다. 낮의 열기가 아직 파란 칠 안에 고여 있었다. 손을 대면 미지근한 것이 손바닥으로 배어 나왔다.
여름이 못 끝을 페인트에 대고 천천히 긁기 시작했다. 쇠가 칠을 파고드는 소리가 얕게 났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사이사이로 그 소리는 자꾸 끊겼다 이어졌다. 여름은 고개를 숙인 채 오래 손을 놀렸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무엇을 그리는지 알아보려는 척했지만, 실은 숙인 목덜미와 못을 쥔 손가락 마디만 보고 있었다.
한참 뒤 여름이 손을 뗐다. 페인트가 얕게 벗겨진 자리에 손톱만 한 고래가 있었다. 등이 둥글고 꼬리가 위로 튄, 조금 기울어진 고래였다.
“내 거.”
여름이 못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네 것도 새겨. 옆에 나란히.”
나는 못을 받아 쥐었다. 녹의 서걱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쥐고만 있었다. 끝을 페인트에 대지 못하고 손안에서 방향만 이리저리 돌렸다. 여기에 내 고래를 새기고 나면, 이 밤이 정말로 끝나버릴 것 같았다. 나란히 놓인 두 마리가 무언가를 확정 지어버릴 것 같았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보다 무겁게 손목에 얹혔다.
“다음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후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오지 않게 붙들었어야 했는데 늦었다.
여름은 나를 잠깐 봤다. 무슨 표정이었는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못을 도로 가져가 손바닥 위에 올리고 천천히 굴렸다. 난간에는 여름의 고래 하나만 남았다. 그 옆자리는 새 페인트 그대로 파랗게,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채였다.
난간 위에는 아까 가져다 둔 캔 두 개가 있었다. 딴 지 오래되어 겉면의 물기가 다 말라버린 캔이었다. 여름도 나도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여름이 캔 하나를 집어 손안에서 몇 번 굴리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근데 있잖아.”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내년에도 올 거지? 여기.”
나는 대답 대신 난간의 빈자리를 내려다봤다. 목 끝까지 한꺼번에 밀려 올라오는 것들이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 뉴질랜드가 여기서 얼마나 먼지 아느냐는 물음. 유월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전부터 삼켜온 문장 전부. 그것들이 서로 엉겨서 하나도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목에 걸렸다.
나는 그 전부를 다시 삼켰다. 완벽한 순간은 내일 아침에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첫차를 배웅하는 정류장에서, 마지막에, 딱 한 번 제대로. 지금은 아니라고. 그렇게 미루는 편이 지금 입을 여는 것보다 쉬웠다.
“응.”
그 한 글자만 나왔다.
여름이 픽 웃었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쩐지 이미 다 알아버린 사람의 웃음처럼 보여서, 나는 여름의 얼굴을 더 보지 못하고 캔으로 눈을 돌렸다. 손바닥에 남은 미지근한 물기만 오래 느꼈다.
“그래.”
여름은 그렇게만 말하고 못을 청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으로 못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봤으면서도 붙잡지 못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난간에 팔을 걸고 있었다. 아래에서 파도가 규칙적으로 부서졌다. 여름의 숨소리가 그 사이에 섞여 들었다가 다시 파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 리듬에 내 숨을 맞추고 있었다. 여름이 언젠가 옥상에서 했던 말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고래는 숨을 쉬려고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나는 그 밤 내내, 올라와야 할 순간에 자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여름이 먼저 몸을 세웠다.
“먼저 내려간다. 아침에 정리할 거 많아.”
계단 쪽으로 몇 걸음 가다가, 그는 잠깐 멈춰 섰다. 등만 보였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계단 아래 어둠 속으로 내려가 버렸다. 슬리퍼가 시멘트 계단을 밟는 소리가 한 층, 두 층 멀어지다가 끊겼다.
나는 혼자 남았다. 난간 위의 캔 두 개는 그대로 두었다. 손을 뻗어 여름의 고래 옆,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파란 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매끈했다. 조금 전까지 못이 있었으면 지금 여기에 뭐라도 그을 수 있었을 텐데. 못은 여름이 주머니에 넣어 가져갔다. 이제 나에게는 새길 도구조차 없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정확한 벌처럼 느껴졌다.
난간을 문지르던 손끝에 페인트의 미지근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낮의 열기가 밤새 조금씩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아침이면 이 온기도 없을 것이다.
방으로 내려왔다. 불을 켜지 않고 창틀 앞에 앉았다. 손끝으로 얕게 파인 금들을 훑었다. 세 개. 여름을 기다린 날들의 눈금. 새 금을 그을 볼펜은 손에 쥐고 있었지만, 나는 긋지 못했다. 오늘을 하루로 세고 나면, 셀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인정하는 일 같아서.
볼펜을 내려놓고, 대신 청바지 주머니에서 필름 통을 꺼냈다. 여름이 낮에 내 손바닥에 올려준 것. 다 감긴 첫 번째 통이었다. 방파제에서, 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번갈아 담은 하루가 그 안에 말려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오래 봤다. 작고 가벼운데, 손안에서 자꾸 무거워졌다.
내일이면 이 여름의 온도가 저 안에 다 갇혀버릴 거라는 걸, 나는 그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다만 갇힌 것을 언젠가 다시 꺼내 보면 된다고, 그것도 다음으로 미루면 되는 일이라고 믿었다. 아침에 배웅하면서, 정류장에서, 완벽하게. 나는 필름 통을 다시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창밖에서 파도가 한 번 더 부서졌다. 옥상에서는 아까 그 캔 두 개가 아무도 마시지 않은 채 밤새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창틀에 이마를 대고, 여름이 계단을 내려가며 남긴 말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너 진짜, 매번 다음에더라. 그 말의 끝이 물음표였는지 마침표였는지, 어둠 속에서는 끝내 가늠되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방 안까지 얕게 밀려들었다가, 다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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