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19화 / 전 32화6

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19화. 필름 안에 갇힌 여름

강선우


“필름 아까우니까 오늘은 네가 반, 내가 반.”

조식 그릇을 마지막으로 개수대에 엎어놓기가 무섭게 여름이 제 목에서 카메라 끈을 벗어 내 목에 걸었다.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끈에는 아직 여름의 목덜미에서 옮겨 온 온기가 남아 있어서, 그게 내 쇄골 위에 얹히는 순간 나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아니, 그게. 찍을 줄도 모르는데.”

“몰라도 돼. 그냥 보이는 대로 눌러.”

여름은 벌써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마당으로 나갔다. 아침 볕이 감나무 잎을 하나씩 세어가며 마당에 얼룩을 놓고 있었다. 여름이 그 나무 아래 서서 나를 돌아봤다.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턱을 살짝 든 채였다.

“뭐 해. 안 찍고.”

나는 카메라를 들어 눈에 붙였다. 손가락이 셔터 위에서 몇 번 미끄러졌다. 뷰파인더라는 작은 사각 안에 여름이 들어왔을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봤다. 렌즈 안의 여름은 실제보다 작았고, 동시에 훨씬 또렷했다. 마당의 소음도, 빨랫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도 그 사각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남은 건 여름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두 달 가까이 이 마당을 같이 쓰면서도 나는 여름을 이렇게 오래, 정면으로 본 적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늘 먼저 시선을 떨어뜨린 건 나였다. 그런데 카메라가 얼굴을 반쯤 가려주니 마음이 놓였다.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동안만큼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여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부끄러웠고, 그만큼 다행이었다.

셔터를 눌렀다. 필름 감기는 소리가 손가락 밑에서 톡, 하고 한 칸 넘어갔다.

“한 장 나갔다.”

여름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남은 장수를 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점심 무렵 우리는 방파제로 내려갔다. 바닷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와 여름의 앞머리를 자꾸 뒤로 눌렀다. 여름은 카메라를 도로 뺏어 갔다가,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내 손에 쥐여줬다. 그렇게 서로를 번갈아 찍었다. 렌즈를 넘겨받을 때마다 여름의 손끝이 내 손등을 스쳤다.

“너 왜 자꾸 나 볼 때만 눈을 그렇게 떠?”

여름이 렌즈 너머에서 물었다. 나를 향해 카메라를 겨눈 채였다.

“아니, 그게.”

“봐, 또 그런다.”

여름이 웃으며 셔터를 눌렀다.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얼굴로 찍혔는지 영영 보지 못할까 봐 조금 두려웠다. 방금 눌린 그 한 컷 안에 내 마음이 다 드러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은 필름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파제 끝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여름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엔 옆얼굴이었다. 바람에 눌린 머리카락 몇 올이 뺨에 붙었다 떨어졌다. 콧등에는 볕에 옅게 앉은 주근깨가 몇 개 있었다. 가까이서는 한 번도 세어본 적 없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 칸씩 눌러 담았다. 이렇게 필름 안에 넣어두면 이 여름이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름은 정직했다. 한 컷을 누를 때마다 남은 장수가 줄었고, 마지막 주가 그렇게 한 장씩 없어지고 있다는 걸 나는 애써 셈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 여름이 마지막으로 나를 겨눴을 때, 손가락 밑에서 필름이 헛도는 감각이 왔다. 더 감기지 않았다. 오일장에서 내가 사준 두 통 중 한 통이 그렇게 다 돌아간 것이었다.

여름이 뒤판을 열어 필름 통을 꺼냈다. 작고 검은 원통 위로 저녁 빛이 붉게 얹혔다. 여름은 그걸 내 손바닥에 툭 올려놓았다.

“이건 네 거 해.”

“내가 왜.”

“나중에 같이 현상하자던 거, 이걸로. 오늘 거 다 들었잖아.”

나는 그 통을 손안에 쥐었다. 미지근했다. 종일 여름의 카메라 안에서, 여름의 손안에서 돌아다닌 온기였다. 목 끝까지 물음이 차올랐다. 구월이면 정말 가는 거냐고, 가면 얼마나 있다 오는 거냐고. 이번엔 뷰파인더가 없었다. 여름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맨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 눈을 그렇게 오래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또 완벽한 순간이 따로 있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오늘 밤도, 내일도, 아직 며칠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믿는 편이 지금 입을 여는 것보다 쉬웠다. 나는 필름 통을 청바지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그 작은 무게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수평선 쪽으로 해가 반쯤 잠겼다. 여름은 난간에 팔을 얹고 그 광경을 오래 봤다. 나는 여름을 봤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그 얼굴을 가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곧 시선을 바다 쪽으로 옮겼다.

그 필름 통은 스무 해가 지난 지금도 내 가방 안주머니에 있다. 이사를 열 번 다니는 동안 짐을 절반씩 버렸는데도 그것만은 버리지 못했다. 한 번도 빛을 본 적 없이, 그해 마지막 주의 우리를 안에 가둔 채. 나는 아직도 그 안에 여름의 어떤 얼굴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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