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18화 / 전 32화5

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18화. 구월의 금과 떫은 감

강선우


유리창에 남은 테이프 자국은 반쪽만 X자를 이루고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어젯밤 여름이 붙이다 만 채로 두고 간 자리였다. 나는 손톱을 세워 남은 부분을 끝에서부터 벗겨냈다. 밤새 습기를 먹은 테이프는 미끈하게 늘어나며 유리에서 떨어졌고, 자국이 지워진 자리에는 끈끈한 것이 남아 손끝에 들러붙었다. 물수건으로 문질러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끈적임을 지우려는 것도 아니면서 같은 자리를 오래 문질렀다.

마당은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밤새 벽을 넘던 파도 소리는 사라지고, 젖은 시멘트 위로 아침 볕이 얇게 깔렸다.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빨랫줄 아래 널브러져 있었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파란 비닐 조각이 담벼락 밑에 붙어 파닥거렸다. 나는 걸레를 다시 헹구러 세면장으로 갔다. 손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 손에게 다른 생각을 시킬 수 있었다.

주방에서 기름 냄새가 넘어왔다. 아저씨는 밤새 물에 젖은 쌀자루를 문간에 세워 말리며 갈치를 굽고 있었다. 팬 위에서 은빛 토막이 지글거렸고, 그 냄새가 눅눅한 복도 끝까지 밀려왔다. 나는 젖은 걸레를 쥔 채 문틀에 기대섰다.

“밥은 묵고 하나.”

아저씨가 젓가락으로 생선을 뒤집으며 물었다. 나는 이따가 먹겠다고 했다. 아저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여름이 그 가시나, 서울 안 가고 아예 멀리 간다 카데. 구월에 비행기 탄다 안 카나.”

팬 위에서 껍질이 오그라드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듣고 나서도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워킹홀리데인가 뭔가, 사진 찍으러 저 밑에 뉴질랜드까지 간다 안 카나. 니는 몰랐나?”

들고 있던 걸레에서 물이 뚝, 뚝 떨어져 발등을 적셨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서 있었다. 몰랐다는 말도, 안다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게…”

내 입에서 나온 건 그게 전부였다. 아저씨는 그제야 나를 한 번 흘긋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팬으로 눈을 돌려 갈치 가운데 토막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살이 부서지지 않게 접시 위에 가만히 내려놓고, 젓가락 끝으로 등뼈를 눌러 가시를 하나씩 발라냈다. 하얀 살점이 접시 위에 도톰하게 쌓였다. 아저씨는 그 접시를 조리대 끝으로 밀어 내 쪽에 놓았다. 아저씨의 다정함은 늘 밥그릇과 생선 한 토막으로 왔다. 나는 그 접시를 받지 않고 걸레를 다시 고쳐 쥐었다.

걸레에서 또 물이 떨어져 발등을 적셨다. 이번에는 차가운 게 느껴졌다. 팬에서 껍질이 오그라드는 소리, 기름이 튀는 소리, 창밖에서 파란 비닐이 파닥거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귀에 들어왔다가 멀어졌다. 갈치 기름 냄새가 콧속에 가득 찼는데도 나는 그게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구월, 하는 두 글자만 귓속에 남아 자꾸 되돌아왔다.

방으로 올라와 나는 창틀 앞에 섰다. 볕이 들지 않는 302호에서도 창틀의 홈만은 손끝으로 셀 수 있었다. 볼펜으로 눌러둔 얕은 금들이 나무 결을 따라 나란히 파여 있었다. 하나, 둘, 셋. 나는 손가락 마디로 그 홈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여름을 처음 옥상에서 기다린 밤, 만실이던 밤, 오일장을 다녀온 밤. 금 하나가 하루였다.

세다가 손이 멈췄다. 손톱 끝이 마지막 금에 걸렸다. 나는 그 자리를 앞뒤로 문질렀다. 볼펜 자국은 생각보다 깊어서, 나무 결이 살짝 일어난 데가 손끝에 까끌하게 걸렸다. 나는 창틀에서 손을 떼어 책상 서랍 손잡이로 옮겼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못한 엽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반쯤 당겼다가 도로 밀어 넣었다. 서랍이 닫히는 둔한 소리가 방 안에 짧게 울렸다. 손끝에 남은 홈의 감각이 그제야 다르게 만져졌다. 이 금들은 앞으로 다가올 날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날이었다.

점심 무렵 마당으로 내려가니 여름이 감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사이 바람에 떨어진 감들이 젖은 흙 위에 나뒹굴었고, 여름은 그중 하나에 렌즈를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목에 건 카메라가 볕을 받아 반짝였다. 셔터를 누르고, 필름을 감고, 각도를 바꿔 다시 눌렀다.

“너 지금 나 째려봐?”

여름이 렌즈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봤다. 나는 뉴질랜드라는 말을, 구월이라는 날짜를 입에 올리려고 했다. 그걸 물으면 이 여름이 정말로 끝을 갖는다는 게 무서웠다. 아직 붙어 있는 날들마저 그 물음 하나로 지워질 것 같았다.

“아니, 그게… 감 다 떨어졌더라.”

여름은 나를 잠깐 보았다. 그 얼굴에는 웃음도 화도 없었다.

“너는 왜 그래. 물어볼 거 있으면 그냥 물어.”

여름은 다시 감으로 렌즈를 돌리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필름 감기는 소리. 찰칵. 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감을 찍는 소리가 아니라, 남은 날을 한 장씩 지우는 소리 같았다. 나는 여름이 몇 장이나 찍는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흙 묻은 무릎을 털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카메라를 반쯤 들었다가, 셔터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잠깐 멈췄다. 나는 나를 향한 렌즈 앞에서 늘 그랬듯 어색하게 서 있었다. 여름은 셔터를 누르지 않고 카메라를 도로 내렸다.

“필름 아까워.”

여름은 그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당에 혼자 남아 떨어진 감을 하나 주웠다. 아직 단단한 초록이 반, 볕에 익어 물러진 주황이 반이었다. 무른 쪽을 엄지로 누르자 껍질이 손톱 밑으로 우묵하게 들어갔다. 터진 자리에서 미끈한 즙이 배어 나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떫은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나는 그 감을 다시 흙 위에 내려놓지 못하고 손안에서 몇 번 굴렸다. 물컹한 자리가 손바닥에 자꾸 눌렸다.

가방 안주머니에 든 필름 한 통이 그 순간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오일장에서 여름이 나를 처음 찍은 그 필름. 두 달 뒤에 함께 현상하자던, 아직 빛을 본 적 없는 그 한 통. 나는 즙 묻은 손을 슬며시 등 뒤로 감췄다. 여름이 이미 안으로 들어가 마당엔 아무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구월까지 남은 날이 며칠인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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