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이번 생의 갑
21화. 내가 먼저 만드는 유행완결
스팀 다리미가 쉭, 소리를 내며 원단 위로 김을 올렸다.
파리 3구, 쇼룸 뒤 창고. 오후 4시 20분.
행어 스물세 개가 벽을 따라 줄지어 걸렸고, 인디고 데님 라인이 맨 앞이었다.
지안은 박스 하나를 뒤집어 앉아 노트를 무릎에 펼쳤다.
2월 마지막 주까지는 줄이 빽빽했다.
3월 둘째 주 칸에서 글씨가 끊겼다.
그다음 페이지는 하얬다.
“여기서부터는 데이터가 없네요.”
뒤에서 종이컵이 넘어왔다. 커피 냄새가 스팀 냄새를 밀어냈다.
“불안하십니까.”
“아니요.”
지안은 노트를 덮어 행어 봉에 걸린 카멜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없으면 만들면 되죠. 구매 담당자 미팅 시트 주세요. 주문 취소 다시 계산할게요.”
시헌이 클립보드를 건넸다. 지안은 볼펜으로 세 줄을 지우고 숫자를 위로 올렸다.
“파리 세 곳은 컷 안 걸어요. 런던은 옷 종류당 상한 300.”
“런던이 더 크게 부를 겁니다.”
“크게 부르면 다음 시즌에 값을 못 올려요.”
백스테이지 구석에 유라가 앉아 있었다.
파운데이션도 안 올린 얼굴이었다. 무릎에 손을 모으고 발끝만 봤다.
지안이 그 앞에 정산서 한 장을 내려놓았다.
“청구액 18억. 법정 증언 이행분 감액 12억. 잔액 6억.”
유라 눈이 종이 아래쪽 숫자로 떨어졌다.
“남은 두 회차 마치면 3억 더 깎아드려요. 그다음엔 계약 종료. 재계약 없음.”
“…공항에서 티켓 막은 거, 대표님이죠.”
“제17조 3항이요. 계약 기간 중 국외 이동은 사전 서면 승인. 승인은 제가 하고요.”
“저 그날, 그냥 도망가려던 거 아니에요. 저도 무서웠어요. 저도 피해자예요.”
지안은 그 문장을 끝까지 들었다.
전생에도 똑같은 문장을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눈물까지 얹혀서.
“유라 씨.”
“…네.”
“오늘은 그 말 안 해도 돼요. 무대에서는 아무도 안 물어보니까요.”
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제 어디로 가요.”
지안은 대답 대신 워킹 순서표를 내밀었다.
“17번. 마지막 룩이에요.”
종이를 받는 손이 떨렸다.
“이번 생에서 당신이 제 이름 밑에 서는 마지막 3분이고요. 늦지 마세요.”
‘전생엔 3분 만에 내 이름을 지웠지.’
지안은 돌아서서 카멜 코트를 행어에서 내렸다.
7시 정각.
화이트 룸의 조명이 한 단계 내려가고, 첫 룩이 문을 지났다.
인디고 데님 셔츠원피스였다. 3년 전 반지하에서 잔고 전부를 밀어 넣은 그 원단.
두 번째 줄에서 카메라 셔터가 겹쳐 터졌다.
프런트로 세 번째 열에서 펜이 움직였다.
파리 셀렉트숍 세 곳, 런던 구매 담당자, 도쿄 구매 담당자.
쇼 중간에 오더 시트를 무릎에 펴고 옷 종류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네 번째 룩이 나갈 때 파리 지사 직원이 백스테이지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런던이 벌써 붙었습니다. 통로 끝에서 기다립니다.”
“쇼 안 끝났는데요.”
“끝나면 파리 쪽에 밀린다고요.”
지안은 모니터를 한 번 보고 커튼 밖으로 나갔다.
런던 구매 담당자가 오더 시트를 반으로 접어 들고 서 있었다. 어깨가 벽에 닿을 만큼 통로가 좁았다.
“데님 셔츠원피스. 컬러 두 개, 옷 종류당 500장.”
통역이 옮기기 전에 지안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00.”
“우리 매장 열한 곳입니다. 300으로는 두 주면 빕니다.”
“두 주면 비는 게 제가 원하는 그림이에요.”
구매 담당자가 웃었다. 웃는 얼굴로 시트를 톡톡 쳤다.
“작년에도 그런 말 하던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고 창고에 있습니다.”
“그 브랜드는 500을 받았을 거고요.”
지안은 시트를 받아 옷 종류 번호 옆 빈칸에 300이라고 적었다.
“상한은 300 고정. 대신 런던 단독 색상 구성 하나 드릴게요. 잉크 블루. 다른 도시에는 안 넣어요.”
“단독 컬러로 500.”
“단독 컬러라서 300이에요. 어디서도 못 구하니까 값이 붙죠.”
구매 담당자가 통역을 돌아봤다. 통역이 옮기는 동안 지안은 시트를 그대로 내밀고 있었다.
“…추가 주문은.”
“시즌 중 1회. 수량은 첫 주문량의 50퍼센트 이내.”
“그럼 절반은 못 팔고 손님을 돌려보내라는 말입니까.”
“돌려보낸 손님이 다음 시즌 첫날에 와요.”
구매 담당자가 시트를 받아 사인했다. 300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지안이 커튼으로 돌아섰을 때 도쿄 구매 담당자가 벽 쪽에서 명함을 들고 기다렸다.
“일본 전역 독점을 원합니다. 백화점 편집 매장 여섯 곳, 온라인 하나.”
“온라인은 안 드려요.”
“온라인이 절반입니다.”
“그래서 안 드리는 거예요. 온라인은 세온몰 일본 계정으로 저희가 직접 합니다.”
도쿄 구매 담당자의 눈이 잠깐 좁아졌다.
“그러면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만든 수요를 그쪽 온라인이 받습니다.”
“수수료 12퍼센트에 정산 15일이에요. 가격 흐트러질 일 없어요.”
지안은 클립보드를 팔에 걸치고 조건을 하나씩 짚었다.
“오프라인 독점은 도쿄 한 도시 단독. 오사카는 비워둡니다. 시즌당 최소 오더 수량 명시, 정가 유지.”
“오사카는 왜 비웁니까.”
“내년에 그쪽이 오사카까지 달라고 하실 테니까요. 그때 값 이야기 다시 하죠.”
통역이 마지막 문장을 옮기자 구매 담당자가 짧게 웃고 명함을 내밀었다.
“…계약서는 언제 봅니까.”
“내일 오전 열 시. 이 건물 1층이요.”
열두 번째 룩에서 오프화이트 트렌치가 나갔다.
객석 두 번째 줄에서 박수가 먼저 터졌다.
파리 편집숍 두 곳의 담당자가 커튼 옆까지 들어와 있었다.
“파리는 컷 안 걸었죠. 원하는 만큼 쓰세요.”
“그건 고맙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담당자가 손끝으로 시트 아래를 짚었다.
“1월 세일. 저희 매장은 전 브랜드가 참여합니다. 30퍼센트.”
“안 됩니다.”
“규정입니다. 예외 브랜드는 없습니다.”
“그럼 예외를 만드세요.”
지안은 시트를 들어 담당자 눈높이에 맞췄다.
“시즌 중 자체 세일 참여 금지. 정가 유지. 시즌이 끝나고 소진 안 된 물량은 저희가 정가의 70에 되사갑니다.”
“…되사간다고요.”
“세일 걸어서 브랜드 값 깎는 것보다 그게 싸요. 저한테요.”
담당자가 옆 사람과 프랑스어로 두 마디 주고받았다.
“위약 조건은요.”
“오더 금액의 3배.”
“3배.”
“제가 지킬 조건이기도 해요. 되사기 안 하면 저도 3배 물어요.”
담당자가 시트에 이니셜을 적었다.
“…도시 단독은 주십니까.”
“두 곳 다 드려요. 대신 그 두 곳 말고는 파리에 안 풀립니다.”
열일곱 번째 룩은 검은 슬립 위에 흰 셔츠였다.
유라가 걸어 나왔다.
정면만 보고, 턴도 없이 끝까지 걸어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객석에서 짧은 탄성이 지나갔다.
지안은 백스테이지 모니터로 그 3분을 봤다.
‘잘 걷네. 값은 제대로 뽑았고.’
스물한 번째에서 카멜 아웃터가 나갔다.
커튼콜에서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지안이 무대 끝에 서서 고개를 숙였을 때, 파리 지사 직원이 귀에 숫자를 붙였다.
“사전 주문 총 41억입니다. 도매 계정 열아홉 곳.”
“런던은요.”
“300에 사인했습니다. 단독 컬러 조항 들어갔습니다.”
“파리 두 곳은.”
“세일 예외 받아왔습니다. 본사 승인은 내일 온다고요.”
“오늘 밤에 받아요. 오늘 쇼 보고 나온 사람들이에요. 지금은 자기들이 더 급해요.”
지안은 오더 시트를 넘겨받아 맨 아래 칸에 사인했다.
기자 다섯 명이 무대 옆에서 붙었다.
프랑스 기자가 통역을 세우고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유행을 그렇게 정확히 맞히나요. 3년 동안 실패한 시즌이 없습니다.”
통역이 입을 떼기 전에 지안이 마이크를 당겼다.
“유행은 예측하는 게 아니야. 내가 먼저 만드는 거지.”
통역이 잠깐 멈췄다.
지안은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3년 전에는 기억으로 맞혔고, 오늘부터는 제가 씁니다. 다음 시즌 컬러는 이 브랜드가 정할 거예요. 그거 확인하러 다시 오세요.”
셔터가 다시 몰렸다.
무대 옆에서 시헌이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소리를 내지 않고, 세 번.
그리고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내밀었다.
“파리 지사 물류 계약입니다. 정산 조건은 대표님 요구대로 넣었습니다.”
지안은 종이를 받아 접힌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세로로 한 번,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비껴간 접힘.
3년 전 박람회에서 받은 종이도 그 자리에서 꺾여 있었다.
“접는 방식이 여전하네요.”
“접는 자리까지 기억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지안이 짧게 웃었다.
자정.
마레의 낡은 창고 사무실. 시멘트 벽에 물이 흘러내린 얼룩이 그대로 남았다.
전구 하나에 접이식 의자 둘, 테이블 대신 뒤집은 나무 팔레트.
지안은 의자에 앉아 구두를 벗었다. 발뒤꿈치가 벗겨져 있었다.
시헌이 옆에 앉아 코트를 어깨에 덮었다.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파리 지하까지 오셨네요.”
“층수는 안 올렸어요. 판을 올렸으니까요.”
지안은 코트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백지 페이지를 열었다.
볼펜 끝으로 첫 칸을 짚고, 날짜부터 적었다.
내년 3월 둘째 주.
시헌이 몸을 기울여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년 삼월, 둘째 주.”
“네.”
“기억에 없는 날짜죠.”
“오늘 정했어요.”
지안은 그 아래에 컬러 세 개를 적었다.
잉크 블루. 더스티 그린. 오프화이트.
그 밑에 한 줄 더 붙였다.
파리 도매 정산 주기 15일.
시헌이 그 줄도 읽었다.
“파리 도매, 정산 주기 십오 일.”
“소리 내서 읽으면 못 바꾸는데요.”
“그래서 읽었습니다.”
지안은 볼펜을 시헌 쪽으로 돌려 내밀었다.
“한 줄 쓰세요.”
시헌이 볼펜을 받아 잠깐 들고 있었다.
“제가 여기 쓰면, 못 지우실 텐데요.”
“지울 생각으로 주는 거 아니에요.”
시헌이 지안의 글씨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파리 슬롯, 3월부터 하루 120파레트.
그 옆에 이름 두 자를 썼다. 사인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었다.
“이건 계약서 아니에요.”
“압니다.”
“그럼 뭐예요.”
“약속으로 하죠. 조항 없이.”
지안은 노트를 닫고 무릎 위에 얹었다. 종이 표지가 아직 따뜻했다.
“차 대표님.”
“네.”
“22시 40분 인천발 그 비행기요.”
“두 좌석 다 비었습니다. 유라 씨 티켓은 대표님이 잠갔고, 옆자리는 발권 취소됐습니다.”
“발권자 명의는요.”
“태건그룹 회장 비서실입니다. 취소 사유는 안 적혀 있습니다.”
지안은 창고 천장의 배관을 올려다봤다.
“아들 쪽은 직무정지로 끝났고요.”
“이번 주 이사회에서 등기까지 정리됐습니다.”
“그러면 다음은 아버지네요.”
시헌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서워요.”
지안이 바로 대답했다.
“근데 저 사람은 여기까지 직접 오려고 표를 끊었어요. 아들 대신 자기가 나오겠다는 뜻이죠.”
“그럼요?”
“그러면 이번엔 제가 시간을 정할게요.”
지안은 발끝으로 구두를 끌어당겨 다시 신었다.
같은 시각, 서울.
태건 본가 서재의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권 회장은 책상 왼쪽에 놓인 서류를 손등으로 밀었다.
표지에 아들 이름이 있었다. 그 위에 이사회 의안 번호가 찍혔다.
밀려난 종이가 책상 모서리에서 반쯤 걸쳐 멈췄다.
회장은 오른쪽 보고서를 당겨 펼쳤다.
‘아뜰리에 안 파리 런칭 및 세온 지분 구조 검토’.
첫 장에 사전 주문 41억, 도매 계정 열아홉 곳, 파리 편집숍 독점 조건이 표로 정리돼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비서가 수첩을 펼쳤다.
“쇼는 두 시간 전에 끝났습니다. 현지 매체 반응은 오전에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세온 지분.”
“차시헌 대표 개인 지분 34퍼센트. 창업 초기 재무적 투자자 두 곳이 21퍼센트, 둘 다 6개월 전에 재계약했습니다.”
“우호지분 합치면.”
“과반입니다. 시장에서 살 물량이 없습니다.”
회장이 세 장을 넘겼다. 세온몰 수수료 12퍼센트, 정산 15일에 형광이 칠해져 있었다.
“이 수수료가 업계 평균인가.”
“평균은 18에서 22입니다. 아뜰리에 안만 12입니다.”
“왜 깎아줬어.”
“계약서에는 초기 입점 브랜드 조건으로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3년 전 차 대표가 직접 사인했습니다.”
“직접.”
“박람회장에서요. 그날 자리에 대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회장은 그 장에 손을 얹은 채로 잠깐 말이 없었다.
“아뜰리에 안. 초기 자금은 어디서 왔나.”
“본인 자금 4천만 원입니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시작했고, 그 뒤로 외부 투자는 한 번도 안 받았습니다.”
“3년에 이 매출을 은행으로 굴렸다고?”
“은행 대출도 없습니다. 세온 선정산으로 원단값을 돌렸습니다. 15일이면 현금이 돕니다.”
회장이 보고서 여백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지분은.”
“서지안 100퍼센트입니다. 스톡옵션도 없고, 우선주도 없습니다.”
“그러면 살 게 없다는 말이군.”
“…네.”
“주식 추가 발행 유도는.”
“돈이 급하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은 회사에는 증자를 밀어넣을 구멍이 없습니다.”
회장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사진 한 컷이 붙어 있었다.
무대 끝에서 마이크를 당겨 잡은 여자. 카멜 코트를 팔에 걸치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납품처는.”
“원단 세 곳, 봉제 두 곳. 전부 3년 넘게 거래했고 단가를 깎은 기록이 없습니다.”
“거래를 끊게 붙어본 사람은.”
“작년에 있었습니다. 봉제 쪽에 사람을 넣었는데, 그 공장이 먼저 아뜰리에 안에 알렸습니다.”
“…먼저 알렸다.”
“네. 계약서보다 그쪽 사장이 오래 알던 사이라고요.”
회장이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여백에 한 줄을 그었다.
글씨는 크지 않았다.
“재혁이는 빼. 이번엔 내가 직접 만난다.”
비서가 수첩을 들어올렸다.
“파리행은 다시 잡을까요.”
회장은 만년필을 보고서 위에 눕혀 놓고, 밀어둔 아들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됐어.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게 싸고 편하지.”
보고서를 덮는 손이 사진 위에서 한 번 멈췄다.
“서지안, 파리에서 언제 돌아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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