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20화 / 전 21화0

4부. 이번 생의 갑

20화. 계약서 없는 선택

서지안


“이 벽은 안 뜯습니다.”

이 실장이 손에 든 도면에서 눈을 뗐다.

“대표님, 곰팡이인데요.”

“그것도 그대로.”

지안은 반지하 문에 붙은 A4를 손끝으로 눌렀다.

‘아뜰리에 안’. 3년 전 편의점 프린터로 뽑아 테이프로 붙인 종이였다.

가장자리가 노랗게 삭았는데 접착테이프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1층은 전시장, 2층 고객 지원, 3층 디자인실. 여기는 비워둬요.”

“창고로도 안 쓰고요?”

“네. 그대로.”

이 실장이 서류철을 넘겼다.

“등기 완료됐습니다. 사들인 금액 27억, 잔금은 어제 나갔고요. 건물 전체 소유주 서지안.”

지안은 매매계약서 사본을 받아 들었다.

종이가 새것이라 손에 착 감겼다.

일주일 전, 이 계단 위에서 태건 회장 비서실장이 내민 봉투도 이렇게 뻣뻣했다.

세 시에 나갔고, 사인은 하지 않고 나왔다.

회장이 준비한 계약서의 첫 장 제목은 ‘화해 및 상호 불가침’이었다.

‘화해라니. 아들 일시 업무 정지를 자기 손으로 올린 사람이.’

지안은 곰팡이 자국이 번진 벽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웠다. 3년 전과 똑같은 온도였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저절로 굴러갔다.

권재혁 일시 업무 정지 가결. 찬성 7, 반대 2.

태건 백화점 이탈 브랜드 열아홉 곳.

세온몰 12% 입점 신청 214건.

한유라 손해배상 청구 18억, 법정 증언 이행 조건으로 감면 12억.

전생에 지안을 죽인 문장은 이번 생에 여섯 시 이전에 내려갔다.

다 이겼다.

그런데 배 속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승리 앞에서 위가 조여야 정상인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대표님, 필적 감정 회신 왔습니다.”

이 실장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스캔본 41장째 손글씨랑, 대표님이 받으신 봉투 수신인란. 동일 필적 추정, 유사도 상위 등급이요.”

지안은 화면을 두 번 읽었다.

‘서지안 대표 귀하.’

같은 손이 노트 마지막 장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고, 같은 손이 봉투에 이름을 썼다.

“보고서 원본은 금고에 넣어두세요. 아직 아무 데도 안 씁니다.”

“아직요?”

“네. 아직.”

이 실장이 도면을 말아 쥐고 계단을 올라갔다.

지안은 혼자 남아 반지하 창을 봤다.

여섯 시, 계단에 구두 소리가 났다.

시헌이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내려왔다.

코트 어깨에 저녁 공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서 보자고 하셔서, 계약 얘긴 줄 알았습니다.”

“계약 얘기 아니면 안 오시려고요?”

“아뇨.”

시헌이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걸 가져왔습니다.”

봉투 입구에서 나온 건 사진 두 장과 접힌 A4 한 장이었다.

첫 번째 사진.

파티션 앞에 사업계획서를 두 손으로 안고 선 여자.

부스 번호판이 흐릿하게 찍혔다. B동 47번.

그 뒤로, 명찰을 뒤집어 단 남자가 반쯤 걸려 있었다.

“투자 담당자 위장은 경영 훈련이었다고 말씀드렸죠. 그건 사실입니다.”

시헌이 사진을 손끝으로 밀어 지안 쪽으로 보냈다.

“근데 그날 47번 부스만 두 번 돈 건 훈련이 아니었어요.”

“두 번요?”

“오전에 한 번, 마감 30분 전에 한 번. 두 번째는 계약서를 들고 갔고요.”

지안은 두 번째 사진을 집었다.

이건 훨씬 낡았다. 인화지 모서리가 접혀 흰 줄이 갔다.

새벽 동대문 원단상가. 내려진 셔터 앞.

지안이 미싱집 사장에게 카드를 내미는 옆모습이었다.

“5년 전입니다. 세온 하청 현장 조사 나간 날.”

“5년 전이면.”

“대표님이 회사 만들기도 전이죠.”

시헌이 잠깐 말을 골랐다.

“대금 못 받은 봉제 사장 대신 320만 원 긁는 사람을 봤습니다. 자기 거래처도 아니었어요.”

지안은 사진에서 눈을 못 뗐다.

기억났다. 원단값이 밀려 라인 두 개가 멈춘 날이었다.

그날 지안 통장에 남은 돈은 4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그때 저는 그 결제 왜 하냐고 물어보려다 말았습니다.”

“왜 안 물어보셨어요?”

“물어보면 계산이 나올까 봐요.”

시헌이 짧게 웃었다.

“저는 숫자로 증명 안 되면 사람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직업병이고, 아직 못 고쳤어요.”

“압니다. 10월에 저 문전박대하셨잖아요.”

“그날도 대표님 자료엔 근거가 없었죠.”

“근데 왜 2주 뒤에 오셨어요?”

“근거가 생겨서요.”

시헌이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근데 이 사진 두 장은, 5년 동안 근거가 안 생겼습니다.”

지안은 가방에서 검은 노트를 꺼냈다.

뒤표지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A4를 뽑았다.

3년 전 박람회 마감 30분 전, 어떤 투자 담당자가 내밀고 간 투자 계약서(안).

사인란이 비어 있는 채로 3년을 견딘 종이였다.

지안이 그것을 시헌이 꺼낸 A4 옆에 나란히 놓았다.

두 장의 가운데 접힌 자국이 똑같은 자리에 나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손이 같은 방향으로 접은 종이였다.

“이걸 왜 아직 갖고 계세요?”

시헌이 물었다.

“조항이 깔끔해서요.”

“거짓말도 사무적으로 하시네요.”

“제가 원래 그래요.”

지안은 계약서(안)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3조 2항. 투자자는 브랜드의 디자인 방향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그 문장을 지안은 첫 사업계획서에 거의 그대로 옮겨 썼다.

세 번 고쳐 쓰고도 결국 남의 문장이었다.

“3년 전에 왜 사인 안 하셨는지, 그날 밤에 물어봤었죠.”

시헌이 사진 위에 손을 올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제 대답은 안 들어도 됩니다. 그때부터 지켜봤습니다. 각서도, 파주 참가 자격도 다 핑계였고요.”

지안은 노트를 덮지 못했다.

시헌이 손을 사진 위에 놓은 채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계약서 없이 묻죠. 저랑, 조항 없이 하실 생각 있습니까.”

머릿속에서 습관이 먼저 움직였다.

위험. 지분. 이해관계 대립 신고 범위. 깨짐 시 세온 물류 계약 유지 가능성. 배신 시 회수 가능 금액.

계산은 3초 만에 끝났고, 결론은 명확했다.

‘손해야.’

“위약금은요.”

“없습니다.”

“정산일은.”

“없어요.”

“보증금.”

“없습니다.”

“그럼 제가 일방적으로 손해인데요.”

“네.”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먼저 졌다고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네요.”

지안은 노트를 봤다.

3년치 유행이 적힌 종이. 이 안에 없는 건 딱 하나였다.

전생의 기억 어디를 뒤져도 차시헌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는 처음부터 계산 밖에 있었다.

지안은 볼펜을 집지 않았다.

노트를 덮어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사진 위에 놓인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시헌의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손가락을 접어 왔다.

“조항 없이 하시는 거, 처음이시죠.”

“3년 걸렸어요.”

“저는 5년입니다.”

“그럼 제가 유리하네요.”

“이제 와서 유불리를 따지십니까.”

“직업병이라면서요.”

시헌이 웃었다.

지안도 웃었다.

곰팡이 벽에 붙은 A4가 문틈 바람에 한 번 들썩였다.

배 속이 그제야 소리를 냈다. 오래 눌러둔 것이 풀리는 소리였다.

계단을 올라오는데 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

두 통이 거의 동시에 떴다.

첫 번째, 메일.

파리 마레 편집숍 구매 담당자. 제목은 영문이었고 본문 첫 줄에 날짜가 박혀 있었다.

3월 첫째 주 전시장 참가 자격 확정. 브랜드 단독 초청.

“파리 잡혔습니다.”

지안이 화면을 보여줬다.

“마레요? 거긴 참가 자격 못 뚫는 데 아닙니까.”

“작년 시즌부터 한국 브랜드 두 개 넣기로 예산 잡혀 있어요.”

“그것도 노트에 있습니까.”

“12페이지.”

두 번째, 문자.

세온 법무팀이었다.

한유라, 증언 기일 사흘 전 출국 심사 시도. 목적지 파리.

지안의 발이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18억 중 12억을 감면해 준 조건이 법정 증언이었다.

증언 없이 나가면 감면은 소멸이고, 청구는 원금 그대로 살아난다.

‘도망을 가도 하필 그 도시로.’

시헌이 화면을 같이 봤다.

“공항 잡을까요.”

“아뇨.”

“놔둡니까.”

“놔두면 기록이 남아요.”

지안은 계단 난간에 등을 기대고 검은 노트를 펼쳤다.

2월 마지막 주까지는 글씨가 빽빽했다.

원단, 컬러, 카피 분쟁, 물류 대란, 매체 유포 날짜까지.

3월 첫째 주 칸에서 손이 멈췄다.

전생의 지안은 그 봄에 이미 없었다.

그 뒤로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빈 줄이 페이지 끝까지 이어졌다.

시헌이 어깨 너머로 백지를 들여다봤다.

“여기부턴 뭐가 적혀 있습니까?”

“아무것도요.”

말하는 순간 세 번째 문자가 들어왔다.

세온 법무팀. 두 줄이었다.

출국 심사 통과. 오늘 밤 22시 40분, 인천발 파리행.

동승자 좌석 예약자명 확인 요망. 태건그룹 권 회장 비서실 명의.

지안은 화면을 두 번 읽고 노트를 덮었다.

“차 대표님.”

“네.”

“파리 일정, 사흘 당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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