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이번 생의 갑
19화. 이번 생의 갑은 나야
“올라왔습니다. 세 곳, 6시 2분.”
시헌이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지안은 드립용 주전자를 기울인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물줄기가 가늘게 원을 그렸다.
“헤드라인 읽어주세요.”
“아뜰리에 안, 경쟁사 내부 문건 사전 입수 의혹 2탄. 부제는 유통 협회 자료도.”
“세 곳 다 같아요?”
“조사 하나 안 다릅니다.”
지안은 커피를 두 잔에 나눠 따랐다.
세온 빌딩 17층 회의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모니터 세 대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전생의 그 문장이 세 번 복제되어 나란히 떠 있었다.
‘2탄까지 똑같네.’
“배너요.”
시헌이 출력물을 테이블에 밀었다.
“새벽 4시 51분 집행. 세 곳 전부 같은 대행사, 그 밑에 하청 법인 두 곳. 결제 카드 뒷자리 4408.”
“명의는요.”
“오늘 아침에 확인했습니다. 권재혁.”
지안은 종이를 들어 형광펜으로 4408 위에 선을 그었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전생엔 이 문장을 침대에서 봤어요.”
머그를 내려놓고 말했다.
“휴대폰 화면으로요. 누워서.”
시헌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서류 뭉치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얹었다가 뗐다.
“오늘은 서 계시잖아요.”
“그러네요.”
“오늘 끝나면, 계약서 없는 얘기 하나 합시다.”
지안은 노트를 덮었다.
“그건 열한 번째 안건으로 미뤄요.”
“안건이 열 개나 됩니까.”
“아홉 시 오십 분까지 아홉 개예요.”
지안이 코트를 집었다.
“광화문으로 가죠.”
*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19층.
의자 여든일곱 개가 다 찼고, 뒤쪽 삼각대에 카메라 열네 대가 걸렸다.
생중계 채널 세 곳의 빨간 램프가 나란히 켜졌다.
지안은 단상에 올라 인사도 하지 않고 노트북에 케이블을 꽂았다.
“음성부터 듣겠습니다.”
스피커가 잡음을 한 번 뱉었다.
지하주차장 특유의 울림이 홀 천장까지 올라갔다.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디데이 하루 전 여섯 시에 세 곳 동시에. 아홉 시에 백화점 세 곳 걸고. 이틀 뒤에 정산 잠가.”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노트 사진 세 장이면 되죠? 그거면 스파이 되는 거잖아요.”
“세 장이면 충분해. 나머지는 기자가 알아서 써.”
셔터가 한꺼번에 터졌다.
지안은 음성을 26분 전체로 돌리지 않았다.
4분 12초에서 끊고 다음 장을 띄웠다.
“방금 목소리는 태건유통 권재혁 고위 임원, 그리고 제 전속 모델 한유라 씨입니다. 녹음 일자는 12월 19일, 장소는 한남동 지하주차장. 전문 26분은 자료집 뒤쪽에 녹취록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앞줄에서 손이 올라왔다.
“대표님, 이건 불법 녹음 아닙니까.”
“차량 소유자 동의로 확보한 블랙박스 음성입니다. 소유자는 한유라 씨 매니저고, 동의서는 자료집 47페이지에 있습니다.”
손이 내려갔다.
지안은 화면을 넘겼다.
집행 내역표가 떴다.
“오늘 새벽 4시 51분, 매체 세 곳에 동일한 배너가 걸렸습니다. 집행 광고비 총액 4억 2,700만 원. 대행사 한 곳, 그 아래 하청 법인 두 곳을 거쳤습니다. 두 법인 다 작년 9월에 설립됐고, 직원 수는 각각 한 명입니다.”
지안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상위 결제선은 태건유통 마케팅 특별예산. 카드 뒷자리 4408, 사용자 명의는 권재혁 고위 임원입니다.”
셔터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중간쯤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남기욱이었다.
“그 결제 내역, 출처가 어딥니까. 기업 내부 자료를 이렇게 들고 나오시는 게 오히려.”
“남기욱 기자님.”
지안이 이름을 부르자 홀이 조용해졌다.
“12월 22일 새벽 3시 47분, 제 사무실 복합기에서 노트 41장이 스캔돼서 기자님 메일로 갔습니다. 그 장수, 그 시각, 로그 남아 있고요. 41장째 손글씨 필적 감정은 오늘 오전 중에 나옵니다.”
“저는 제보를 받은 거지.”
“제보자 이름 말씀하실 수 있으면 지금 하세요. 지금 못 하시면, 그 이름은 검찰에서 말하게 되실 거예요.”
남기욱이 앉았다.
지안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여기까지가 꼬리다.’
*
마지막 봉투는 단상 아래에 두었다.
지안이 그걸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건 제가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다.”
봉인을 뜯었다.
“판교 태건 물류센터 지하 창고, 대포 장부 217억.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열아홉 개 페이퍼 법인을 거쳤습니다. 법인 명단, 계좌 흐름, 세금계산서 발행 내역 전부 여기 있습니다.”
홀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생에, 그 집 안방 화장대 서랍 두 번째 칸에서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서랍을 열었던 밤에 자기 브랜드가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도.
“자료 나눠 드리세요.”
세온 법무팀 직원 둘이 통로 양쪽으로 122부를 돌렸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홀을 한꺼번에 덮었다.
10시 41분, 뒷줄 기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태건 지금 9.8퍼센트 빠졌어요. 장중이요.”
지안의 휴대폰이 단상 위에서 진동했다.
태건 홍보실 번호가 열두 번 찍혔다.
열세 번째는 다른 번호였다.
지안은 화면을 확인하고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마이크 앞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야, 서지안.”
홀이 얼어붙었다.
우아한 척이 벗겨진 목소리가 스피커 세 개를 타고 생중계로 나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너를, 내가 너 그 반지하에서 건져 올려주려고 했던 거 잊었어? 지금 당장 마이크 끄고 내려와. 안 그러면 너 진짜.”
“진짜 뭐요.”
“…뭐?”
“끝까지 말씀하세요, 고위 임원님. 지금 카메라 열네 대 돌아갑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너 이거 못 이겨. 우리가 어떤 집안인지 몰라서 이래? 너 하나 지우는 거, 나 전화 한 통이면.”
“알아요.”
지안이 말을 잘랐다.
“전화 한 통이면 되죠. 새벽 여섯 시에 세 곳, 아홉 시에 백화점, 이틀 뒤에 정산 잠금. 매뉴얼 그대로 하시더라고요. 저 그거 한 번 당해봤어요.”
“…뭐라고?”
지안은 단상에 팔꿈치를 얹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홀 전체가 그 낮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멈췄다.
“이번 생의 갑은 나야.”
통화가 끊겼다.
지안은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고 마이크를 제자리로 돌렸다.
“질문 받겠습니다.”
손이 스물 몇 개가 동시에 올라갔다.
11시 12분, 속보가 떴다.
태건그룹 이사회 긴급 소집, 권재혁 대표이사 직무정지 안건 상정.
*
회견장 문을 나서자 비상계단 앞에 유라가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 채였다.
지안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이용당한.”
거기서 멈췄다.
지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봤기 때문이다.
유라가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18억이요.”
“…네?”
“뒷거래 6회, 회차별 3억. 청구서는 다음 주 화요일에 등기로 갑니다. 주소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보낼게요.”
유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 그 돈 없어요. 진짜 없어요.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 채무도.”
“알죠. 3,800만 원, 제가 갖고 있고요.”
지안이 계단 난간에 손을 얹었다.
“대신 조건 하나 드릴게요. 증언대에 서세요.”
“…증언이요.”
“권재혁 고위 임원 지시로 매체 세 곳에 자료를 넘겼다, 노트 사진 세 장을 찍어서 조현우 상품 기획자에게 보냈다, 지시 시점과 방법은 이렇다. 법정에서 그대로 말하면 회차별로 깎아드립니다.”
“얼마나요.”
“한 번 나올 때마다 3억씩요. 여섯 번 나오면 0원이에요.”
유라가 숨을 삼켰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이 여자는 눈물이 흐르는 중에도 사다리부터 세어본다.
“계산은 제가 하죠.”
지안이 돌아섰다.
“울지 마세요. 여기 아직 카메라 있어요. 그 얼굴로 찍히면 이번엔 여론이 안 받아줘요.”
*
로비 유리문 안쪽에서 시헌이 코트를 들고 서 있었다.
지안이 다가가자 어깨에 걸쳐줬다.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네요.”
“누구요.”
“이번엔 태건이요.”
지안이 코트 앞섶을 여몄다.
“차 대표님도 하셨잖아요, 그 말.”
“저는 제일 먼저 했죠. 그건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이 사람은 이런 순간에 이런 말을 한다.’
지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필적 감정소였다.
지안이 메일을 열었다.
첨부 이미지 두 장, 결과 요약 세 줄.
읽는 속도가 중간에서 느려졌다.
“뭡니까.”
시헌이 옆으로 왔다.
“41장째 손글씨요.”
지안이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
“한유라 아니에요. 남기욱도 아니고, 조현우도 아니에요.”
“…그럼.”
“제4의 필적. 비교 대상 열여섯 개 중에 일치 항목이 하나 나왔대요.”
“어느 비교 대상입니까.”
지안이 손끝으로 마지막 줄을 짚었다.
거기서 손이 멈췄다.
두 사람이 동시에 유리문 밖을 봤다.
검은 세단이 소화전 앞에 정차해 있었다.
앞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코트 단추를 다 채운 노년의 남자였고, 걸음에 서두름이 없었다.
시헌의 표정이 바뀌었다.
“태건 회장 비서실장입니다.”
남자가 회전문을 밀고 들어와 지안 앞에 섰다.
인사를 정확히 15도로 했다.
“서지안 대표님. 회장님께서 계약서를 한 장 준비하셨습니다.”
봉투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봉인 위에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지안은 받지 않았다.
“아드님 직무정지 안건이 한 시간 전에 올라갔는데요.”
“그건 회장님께서 올리신 안건입니다.”
지안의 손끝이 멈췄다.
“오후 세 시입니다. 장소는 봉투 안에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봉투를 지안의 손에 쥐여주고 돌아섰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시헌이 낮게 말했다.
“가지 마세요.”
지안은 봉투를 뒤집었다.
수신인 칸에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지안 대표 귀하.
그 글씨를, 지안은 방금 휴대폰 화면에서 봤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