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이번 생의 갑
18화. 종이 스물세 장으로 이겼어
스테이플러가 종이 스물세 장을 한 번에 물었다.
지안은 그 뭉치를 들어 무게를 재보고 첫 장을 넘겼다.
표지에는 한 줄만 찍혀 있었다.
경력·학력 원본 대조표.
“백스물두 부 맞죠.”
“맞습니다. 좌석 수랑 똑같이요.”
실장이 통로 끝까지 걸어가며 의자마다 자료집을 놓았다.
광화문 프레스센터 19층, 오전 아홉 시 사십일 분.
지안은 맨 뒷줄까지 걸어가 마지막 의자에 놓인 자료집을 집어 들었다. 뒷줄에서도 표지 글자가 읽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읽혔다.
“대표님, 새벽 그 페이지는요.”
“안 넣었어요.”
“안 넣어요? 그게 제일 센데.”
“오늘은 꼬리 자르는 날이에요.”
지안은 자료집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단상으로 돌아왔다.
‘그 줄은 재혁이 직접 썼어. 재혁 손으로 쓴 건 재혁 앞에서 꺼내야지.’
열 시 정각, 문이 열렸다.
카메라 스물여섯 대가 앞줄을 채우는 데 사 분이 걸렸다.
지안은 마이크 높이를 한 번 낮추고 입을 열었다.
“먼저, 이틀 전 회견에서 나온 ‘노예계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셔터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몰렸다.
“저는 반박하지 않겠습니다.”
앞줄에서 펜이 멎었다.
“대신, 그 계약서에 사인한 손이 누구 것인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지안은 A4 두 장을 나란히 들었다.
“왼쪽은 작년 3월, 계약 테이블에서 한유라 씨가 직접 제출한 프로필입니다. 중앙예술대 연극영화과 졸업, 장편 3편, CF 7편.”
종이를 바꿔 들었다.
“오른쪽은 지난주 학교에서 받은 학적 조회 회신서입니다. 2년 수료, 제적. 그리고 필모 대조 결과 장편 0편, CF 1편.”
앞줄 기자가 자료집을 급하게 넘겼다.
“위조 사유는 단순합니다.”
지안은 잠깐 쉬었다.
“회당 40만 원을 200만 원으로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배요.”
“대표님, 그건 대표님 주장 아닙니까.”
가운데 줄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주장으로 끝낼 생각이었으면 백스물두 부를 찍지 않았습니다.”
지안이 손을 들자 뒤쪽 방송 장비 조작원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앙칼진 반말이었다.
‘3년 묶어주고 위약금 세게 걸어요. 그래야 소속사가 못 데려가니까. 대신 계약금은 다섯 배.’
‘다섯 배요?’
‘대표님도 남는 장사잖아. 나 뜨면.’
장내에서 누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까지가 조건 제안입니다. 제안한 쪽은 저희가 아닙니다.”
지안은 손끝으로 재생 목록의 두 번째 파일을 짚었다.
“다음은 서명 구간입니다. 십일 초입니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스피커를 채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종이 넘기는 소리는 없었다.
십일 초 동안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십삼 페이지짜리 계약서입니다.”
지안은 마이크에서 몸을 조금 뗐다.
“십일 초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닙니다.”
셔터가 한꺼번에 터졌다.
“이의 있습니다.”
두 번째 줄에서 유라 측 대리인이 일어섰다.
“동의 없는 녹취는 증거로 쓸 수 있는 자격이.”
“제4조입니다.”
지안이 잘랐다.
“계약 테이블 참석자 명단, 그리고 녹음 사전 고지 확인서. 자료집 11페이지에 있습니다. 대화 당사자 전원 서면 동의고, 서명란 세 번째가 한유라 씨입니다.”
대리인이 자료집을 넘겼다.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다 손가락이 한 페이지에서 멎었다.
“확인서에 서명한 건 인정합니다.”
대리인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만 그 확인서에 적힌 녹음 목적은 ‘계약 조건 정리’입니다. 언론 공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목적 외 사용입니다.”
앞줄에서 펜 긁는 소리가 다시 살아났다.
‘물고 늘어질 줄 알았어.’
“12페이지 넘겨주십시오.”
지안은 자기 자료집을 들어 보였다.
“확인서 하단 부속 조항입니다. ‘본 녹음물은 분쟁 발생 시 당사 방어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 줄짜리고, 서명란 바로 위에 있습니다.”
“분쟁 발생 시라면 소송 절차 내에서.”
“어제 소송을 낸 사람 측이 기자회견을 먼저 하셨습니다.”
지안은 한 박자 쉬었다.
“소송 밖으로 먼저 나온 쪽이 소송을 낸 사람입니다. 저희가 법정에서만 방어하기로 약속한 조항은 자료집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리인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안은 A4 한 장을 더 꺼냈다.
“확인서 서명 필적 감정 결과입니다. 프로필 필적과 동일인. 위조 서류를 쓴 손이랑, 녹음에 동의한 손이 같은 손입니다.”
이번엔 대리인이 앉았다.
앉으면서 자료집을 무릎 위에 덮었다.
“변호사님, 소장도 같이 보시죠.”
지안은 자료집을 덮었다.
“어제 접수된 계약 무효 소송, 소송 금액 6억. 소송을 낸 이유 세 개입니다.”
손가락 하나.
“첫째, 위협에 의한 의사표시. 방금 들으신 녹취에서 조건을 먼저 부른 쪽이 소송을 낸 사람입니다. 위협당한 사람이 위약금을 세게 걸자고 먼저 말하지는 않습니다.”
손가락 둘.
“둘째, 불공정 약관. 공정거래위원회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와 조항별로 붙여놨습니다. 자료집 14페이지. 저희 계약 기간 3년, 표준 7년입니다. 정산 비율도 저희가 모델 쪽에 유리합니다.”
손가락 셋.
“셋째, 착오. 계약서 낭독 영상이 남아 있습니다. 8분 42초, 제9조와 제17조 위약금 조항은 두 번 읽었습니다. 영상 원본은 오늘 오후에 법원에 냅니다.”
지안은 그제야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전생의 나는 이런 종이 한 장도 없었지.’
기사 세 줄에 브랜드가 죽었다.
해명 자료를 만들 시간도, 그걸 읽어줄 사람도 없었다.
지금 이 방에는 백스물두 명이 앉아 있었다.
“계약서는 읽는 사람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 것이에요.”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등이 서늘해졌다.
‘이번엔 갑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야. 종이 스물세 장으로 이겼어.’
지안은 정면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봤다.
“위조 서류를 만들어 온 쪽은 꼬리입니다.”
숨을 한 번 쉬었다.
“꼬리는 끝났고, 이제 몸통 차례입니다.”
손이 여덟 개쯤 한꺼번에 올라왔다.
“몸통이 어딥니까.”
“오늘 안건이 아닙니다.”
“대표님 노트, 산업스파이 의혹 건도 오늘 해명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목소리가 난 쪽을 지안이 봤다.
세 번째 줄, 남기욱.
“12월 22일 새벽 3시 47분에 저희 사무실 복합기에서 스캔된 41장 말씀이시죠.”
남기욱의 어깨가 굳었다.
“기사에는 그런 날짜 안 썼습니다.”
“기사에 없으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안은 단상 옆으로 반 걸음 나왔다.
“프린터 사용 기록, 출입카드 기록, 그날 새벽 19층 CCTV. 세 개가 같은 시각을 가리킵니다.”
“그건 정보를 준 사람 문제고, 저는 제보받은 자료를 검증해서 썼습니다.”
“검증하셨으면 41장 중에 마지막 장도 보셨겠네요.”
남기욱이 대답하지 않았다.
“기자님 기사에는 40장까지만 인용돼 있습니다.”
“…분량 문제였습니다.”
“41장째에 손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지안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 줄은 제 필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 쓰신 겁니까, 못 쓰신 겁니까.”
앞줄이 일제히 남기욱 쪽으로 돌아앉았다.
카메라 두 대가 통로에서 방향을 틀었다.
“저는 제보자를 밝힐 의무가 없습니다.”
“밝히시라고 안 했습니다.”
지안은 자료집을 들었다 놓았다.
“필적 감정 들어갔습니다. 제 노트에서 나온 글씨가 제 손이 아니면, 그 손이 누구 손인지는 감정서가 말합니다. 기자님은 그때 한 번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 손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남기욱이 볼펜 뚜껑을 닫았다.
“결과 나오면 그날 다시 이 방을 빌리겠습니다. 그때는 자료집이 스물세 장으로 안 끝날 겁니다.”
회견은 열 시 오십사 분에 끝났다.
열한 시 삼십 분, 반품 신청 취소율이 뒤집혔다.
“71%요. 취소송 금액 취소돼요.”
실장이 모니터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광고주 쪽은요.”
“화장품 에이전시에서 방금 전화 왔는데, 본계약 보류 풀겠답니다. 대신 모델은 교체 협의하자고요.”
“교체 안 해요. 위약 조항 그대로예요.”
지안은 태블릿에서 세온몰 실시간 그래프를 열었다.
오전 내내 바닥에 붙어 있던 선이 십 분 단위로 올라왔다.
시간당 4,100만 원.
오후 두 시 사십분, 유라 소속으로 잡혀 있던 광고 세 건이 동시에 촬영 일정을 확정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계약 주체는 아뜰리에 안, 노출 이미지는 전권 위임.
오후 세 시 정각, 팩스가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소 취하서.
지안은 그걸 집어 들고 날짜만 확인했다.
‘어제 냈다가 오늘 거둬. 하루짜리 소송이네.’
“실장님, 취하서 사본 떠서 법무팀에 넘기세요. 그리고 유라 씨 전화 몇 통 왔어요?”
“열아홉 통이요.”
“오늘은 안 받아요.”
말이 끝나기 전에 스무 번째가 울렸다.
지안은 화면을 삼 초쯤 봤다.
그리고 받았다.
“안지안.”
첫마디가 반말이었다.
“너 지금 나 죽이자는 거야?”
“녹음 켰어요.”
“…뭐?”
“오늘 아침에 켠 거 그대로예요. 하실 말씀 하세요.”
수화기 저쪽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학교 두 학기 안 채운 게 죄야? 다들 그렇게 써. 다들 부풀려. 나만 걸린 거잖아.”
“프로필은 부풀린 거고, 회신서는 사실이에요.”
“사실? 사실이 밥 먹여줘?”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나 스물여섯이야. 3년 묶여서 회당 사십만 원 받다가 스물아홉 되면 나 어디 가서 뭐 해. 나도 피해자야. 나도 당한 거라고.”
“당했다는 조건, 유라 씨가 먼저 부르셨어요.”
“그건 대표님이 유도한 거잖아!”
“십일 초요.”
지안이 말했다.
“이십삼 페이지를 십일 초에 사인하셨어요. 그 십일 초 동안 제가 유라 씨 손을 잡고 있었나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사진 얘기 들었지.”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들었어요.”
“내가 뿌린 거 아니야.”
“알아요.”
“안다고?”
“유라 씨는 그 사진 뿌려서 얻을 게 없어요. 얼굴이 유라 씨 거니까.”
지안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굴 없는 쪽이 얻을 게 있죠.”
“……”
“그 손목, 누구예요.”
수화기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십 초쯤 지나고, 유라가 웃었다. 웃음이 반쯤 흐느낌이었다.
“나 진짜 몰랐어. 그 사람이 나 쓰고 버릴 줄은.”
“이름을 말해요.”
“…못 해.”
전화가 끊겼다.
지안은 화면을 내려다보고, 녹음 파일에 이름을 붙였다.
‘꼬리_20.’
지안은 종이를 파일에 끼우고 회견장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시헌이 서 있었다.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벽에 기대 있었다.
“봤어요?”
“19층 뒷문에서 다 봤습니다.”
시헌이 컵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준비한 회견장 법인카드 내역은 안 쓰셨네요.”
“그건 몸통용이에요.”
지안이 컵을 받았다.
“꼬리한테 쓰면 아까워서요.”
시헌이 낮게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멈췄다.
지안의 손에서 종이컵 표면이 잘게 흔들렸다.
커피가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추워서요.”
“19층 난방 잘 되던데요.”
시헌이 컵을 도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잠깐, 지안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체온이 손목뼈에 한 번 눌렸다가 사라졌다.
“떨어도 됩니다.”
“…”
“저 말고는 아무도 못 봤어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 사람 앞에서만 손이 떨리는 게 문제인지, 이 사람 앞이라서 떨리는 게 문제인지 모르겠네.’
“차 대표님.”
“예.”
“필적 감정 결과, 며칠 걸린다고 했죠.”
“닷새요. 세온 법무팀이 붙었으니까 사흘까지 당깁니다.”
“이틀로 당겨주세요.”
“이유는요?”
“오늘 여론이 돌았어요. 재혁은 돌아선 여론을 하루 이상 못 견뎌요. 전생에도 그랬거든요.”
말해놓고 지안은 잠깐 멈췄다.
시헌은 캐묻지 않았다.
“이틀로 당기죠.”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안은 꺼내서 화면을 봤다.
명 실장.
문장은 하나였다.
‘유라 스폰 사진, 오늘 아침에 태건 홍보실이 다른 데서 받았대요. 나 아닙니다.’
시헌이 화면을 같이 봤다.
“공증서에 제3자 제공 금지, 계약 위반 벌금 3억 박아뒀죠.”
“박았어요.”
지안은 화면을 껐다.
“근데 명 실장 손에서 나간 게 아니면, 그 조항으로는 못 잡아요.”
“그럼 어디서 나갔습니까.”
“사진 속에 얼굴이 없어요. 어깨랑 손목만 있죠.”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진이 제일 무서운 사람은 유라가 아니에요. 손목이 찍힌 남자죠.”
“…그 남자가 직접 뿌렸다는 겁니까.”
“자기 손목을 자기가 뿌릴 사람은 하나뿐이에요. 그 손목이 자기 게 아닐 때.”
지안은 종이컵을 시헌 손에서 다시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차 대표님, 회견장 이틀 뒤로 다시 잡으세요. 이번엔 법인카드 쓰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안이 먼저 발을 들이며 말했다.
“꼬리는 오늘 끝났어요. 몸통은 제가 직접 잘라야 하니까, 자리는 제가 지정할게요. 태건 본사 앞 프레스룸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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