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17화 / 전 21화0

3부. 판이 커진다

17화. 계약서는 읽는 사람 것이 아니다

서지안


유라가 먼저 쳤다.

새해 첫 주 목요일, 오전 열한 시.

사무실 모니터 여섯 대에 같은 화면이 떴다.

프레스센터 19층.

흰 셔츠, 화장기 없는 얼굴, 마이크 앞에 앉은 한유라.

그 옆에 법무법인 로고가 두 개.

“판교에서 저를 잡으러 오셨을 때, 저는 무서웠어요.”

지안은 그 문장에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거기까지 대본에 넣었네.’

유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회당 사십만 원이었어요. 삼 년이요. 휴대폰도 뺏겼고요. 저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어요.”

정확히 다섯 번 갈라졌다.

그 다섯 번이 전부 잘려 짧은 영상이 됐다.

“대표님.”

대리가 모니터에서 눈을 못 뗐다.

“오전 대비 매출 마이너스 71퍼센트요. 취소 요청 4,120건. 브랜드명 연관 검색어 1위, ‘노예계약’.”

“고객센터 전화선 몇 개 열려 있어요.”

“네 개요. 다 터졌어요.”

“두 개 닫고, 응대 문구 통일해요. ‘내일 오전 열 시 공식 입장 발표 예정입니다.’ 그 문장만.”

“그거만요?”

“그거만.”

지안은 검은 노트를 펴서 한 줄을 적었다.

1월 첫 주, 유라 회견.

전생엔 없던 페이지.

그 옆줄에 숫자를 썼다.

프레스센터 대여료, 법률 대리인 두 곳 계약금, 회견 세팅 및 중계 대행.

최소 사천.

‘유라한테 그 돈은 없다.’

유라 통장에는 지안이 넘겨받음한 채권 3,800만 원이 그대로 얹혀 있다.

“실장님한테 연락해서, 유라 계좌 입금 내역 요청 서면 준비하라고 해요.”

“예.”

“그리고 오늘 회견장, 대여 결제자 확인해요. 카드 명의부터.”

대리가 받아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지금 온라인 분위기가 진짜…”

“알아요.”

지안은 노트를 덮었다.

“울고 있는 사람 옆에 변호사가 둘이면, 우는 게 제일 싼 비용이에요.”

오후 두 시 사십 분.

사옥 앞 인도가 막혔다.

카메라 열넷, 마이크 여덟.

“서지안 대표님! 위약금 3억 조항 인정하십니까?”

“모델 휴대전화 압수는 감금 아닙니까?”

“판교까지 쫓아가신 거 사실입니까?”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그 컷이 오늘 밤 대표 이미지가 된다.

유리문 앞에서 딱 한 번 돌아섰다.

“질문 다 받겠습니다.”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내일 오전 열 시, 같은 자리에서요. 그때 서류를 가져오죠.”

그러고 들어갔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2층, 기둥 옆에 세워둔 차.

뒷좌석 문을 닫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이 온도, 알아.’

전생의 마지막 주에 딱 이랬다.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파일 하나를 눌렀다.

2024년 4월 11일. 계약 테이블.

스피커에서 아홉 달 전이 흘러나왔다.

“저 서울예대 연극과 나왔고요, 드라마 조연 세 편이요.”

“그러니까 회당 사십은 좀… 육십은 받아야죠.”

“그리고 계약금 삼천, 선지급으로요.”

지안은 되감았다.

한 번 더 들었다.

세 번째에 소리 내어 웃었다.

떨림이 멎었다.

조수석 문이 열렸다.

시헌이 예고 없이 올라탔다.

늘 그런 식이다.

“괜찮냐고는 안 물을게요.”

“고맙네요.”

“대신 이거요.”

봉투 하나가 중앙 수납함 위에 놓였다.

“오늘 회견 홀 대여 결제자 명의. 태건 계열 광고대행사 자회사, 법인카드입니다. 결제 시각은 어제 오후 네 시 십이 분.”

“어제 네 시요.”

지안은 날짜를 머릿속으로 붙였다.

‘판교에서 유라를 데려간 지 열여섯 시간.’

“세팅 대행사도 같은 계열이고요. 중계 방송 내보내기도 걔들이 잡았습니다.”

“울음까지 그쪽 예산이네요.”

“그건 유라 씨 지분이 좀 있을 겁니다. 연기 전공이라잖아요.”

지안이 휴대폰 화면을 시헌 쪽으로 돌렸다.

“저건 뭡니까.”

“학력 위조 자백이요.”

“…예?”

“계약 체결 삼십 분 전. 본인이 조건을 먼저 부른 녹취예요. 서울예대 연극과, 드라마 조연 세 편, 회당 육십, 계약금 삼천 선지급.”

“실제로는요.”

“서울예대에 그 이름 학생 적적 없어요. 드라마 세 편은 단역 두 편이고, 한 편은 아예 방영 안 됐어요.”

시헌이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그걸 아홉 달 동안 안 쓰고 갖고 있었어요?”

“쓸 날을 정해두고 받은 거니까요.”

지안은 코트 안에서 계약서 사본 한 장을 꺼내 그의 무릎에 얹었다.

17조.

유라의 사인이 밑줄 위에 삐뚜름하게 얹혀 있다.

“계약서는 읽는 사람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 것이에요.”

시헌이 사본을 내려다봤다.

“유라는 아홉 달 전에 이걸 안 읽었고요.”

지안이 창밖 기둥을 봤다.

“저는 그때 이미 오늘을 썼어요.”

시헌은 대답 대신 지안의 손을 봤다.

아직 미세하게 떨리는 왼손.

그는 그걸 잡지 않았다.

대신 코트를 벗어 뒷좌석에 걸쳤다.

“내일 열 시, 제가 뒤에 서 있겠습니다.”

“세온 이름 나가면 시끄러워져요.”

“세온 법무 두 명 데리고요.”

“차 대표님.”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지안이 그를 봤다.

농담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서는 자리는 제가 정할게요.”

“그럼 됐습니다.”

밤 열한 시.

사무실 회의실 테이블에 내일 자료를 순서대로 깔았다.

1번. 계약 테이블 녹취, 3분 12초.

2번. 유라 전 소속사 계약 파기 통보서.

3번. 명 실장 채권 넘겨받음 확인서.

4번. 계약 위반 6회분 위약금 청구서, 18억.

지안이 4번을 집어 옆으로 뺐다.

“이건 안 씁니다.”

시헌이 팔짱을 풀었다.

“왜요. 제일 센 패인데.”

“세니까요.”

“…”

“18억 청구서를 카메라 앞에 올리면, 내일 헤드라인은 ‘악덕 대표, 무명 배우에 18억 소송’이에요. 오늘 마이너스 71퍼센트가 마이너스 90이 되고요.”

“그건 그렇죠.”

“저는 유라를 이기려는 게 아니에요.”

지안이 4번을 서랍에 넣고 잠갔다.

“유라 뒤에 돈 낸 사람을 꺼내려는 거지.”

시헌이 1번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럼 내일은 이 세 장만.”

“세 장이면 충분해요. 유라가 ‘피해자’에서 ‘거짓말한 사람’으로 한 칸만 내려가면, 다음 질문이 자동으로 나와요. 그럼 회견은 누가 돈 냈냐고.”

“기자들이 그 질문을 할까요.”

“어제 네 시 십이 분 결제 내역을 제가 안 내면 안 하겠죠.”

지안이 봉투를 손끝으로 톡 밀었다.

“내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거 받은 다른 기자예요.”

시헌이 그제야 웃었다.

“그거 오늘 밤에 뿌리실 겁니까.”

“윤 기자한테요. 열두 시 넘으면 어차피 내일 아침 신문이에요.”

“…대표님.”

“예.”

“오늘 아침에 마이너스 71퍼센트 나왔을 때, 무슨 생각 했습니까.”

지안은 잠깐 자료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세어봤어요.”

“뭘요.”

“제가 몇 번째로 죽는 건가.”

시헌의 턱이 굳었다.

“이번엔 안 죽습니다.”

“알아요.”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서류가 있잖아요.”

새벽 한 시.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자마자 울음이 먼저 왔다.

“대표님.”

유라였다.

“저 이거 안 하고 싶었어요.”

지안은 통화 화면 왼쪽 위, 녹음 표시가 켜진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저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상무님이…”

“상무님이.”

“안 하면 제 사진 뿌린다고. 그거 아직 남아 있대요. 대표님이 다 가져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자기가 더 갖고 있다고…”

‘명 실장, 사인할 때 손이 빨랐지.’

지안은 목소리를 낮췄다.

“유라 씨.”

“네…”

“지금 그 문장, 내일 열 시에 본인 입으로 다시 하실 수 있어요?”

수화통 저편에서 숨이 멎었다.

“제가 변호사 붙여드릴게요. 세온 법무팀이요. 오늘 회견장 대여 결제자 명의도 제가 갖고 있어요. 유라 씨 카드 아니잖아요.”

“…”

“유라 씨가 사인한 계약서는 제가 썼어요. 근데 오늘 아침에 유라 씨가 읽은 그 원고는, 누가 썼어요?”

울음이 끊겼다.

숨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라야, 끊어.”

통화가 끊겼다.

지안은 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시계를 봤다.

새벽 한 시 사 분.

삼 초 뒤, 대리에게서 알림이 왔다.

그다음 초에 시헌의 폰이 울렸다.

유라의 개인 페이지에 사진 세 장이 동시에 올라왔다.

검은 노트.

펼쳐진 페이지.

지안의 글씨.

“올렸네요.”

시헌이 화면을 확대했다.

“12월에 찍었다던 세 장 맞습니까.”

“두 장은요.”

지안이 세 번째 사진을 눌렀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이건 아니야.’

“세 번째는 12월에 없던 페이지예요.”

“…”

“이 줄, 제가 어제 썼어요. 이 방에서.”

시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제가 아닙니다.”

“알아요.”

지안은 화면을 더 키웠다.

페이지 아래쪽, 자기가 쓰지 않은 문장이 한 줄 더 붙어 있었다.

‘태건유통 내부 접촉선 3회, 자료 수령 확인.’

지안의 손이 멎었다.

“차 대표님.”

“예.”

“이 아랫줄, 제 글씨 아니에요.”

“…그럼 누구 겁니까.”

지안은 그 획을 봤다.

ㅅ의 오른쪽 획이 유난히 길게 빠지는 버릇.

숫자 3의 윗머리가 각지게 꺾이는 습관.

전생에 그 손으로 쓴 종이를, 지안은 딱 한 번 자기 이름 옆에 나란히 놓아본 적이 있었다.

혼인신고서.

“권재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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