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판이 커진다
16화. 전생의 기억과 마지막 패
다섯 시 오십구 분에 건 전화는 세 번 만에 받았다.
받은 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안도 하지 않았다.
십칠 초 뒤에 끊겼다.
그리고 여섯 시 정각, 매체 세 곳에 같은 문장이 올라왔다.
그게 일주일 전이다.
일주일 동안 아뜰리에 안의 일 매출은 9억 8,400만에서 1억 7,200만으로 내려앉았고, 세온몰 유입은 버텼고, 커뮤니티에는 지안의 얼굴이 붙은 짤이 스무 개쯤 돌았다.
지안은 그중 하나도 캡처하지 않았다.
대신 벽에 전지를 붙였다.
새벽 한 시 사십 분.
반지하 사무실 형광등 하나가 나가서 오른쪽 절반이 어둡다.
전지 위쪽에는 시헌이 가져온 하청 법인 다섯 개의 이름이 마커로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지안이 지난 이 주 동안 쌓아둔 기록이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광고 집행 시각. 배너 노출 매체. 유라의 뒤거래 여섯 번의 날짜.
“여기요.”
시헌이 A4 한 장을 책상 위로 밀었다.
“메디어캐스트, 온플랜애드, 제이엘커뮤니케이션. 세 곳 대표이사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세금계산서 발행 주소가 성수동 같은 건물 4층이에요.”
“층수까지 같아요?”
“호수도 같습니다. 401호 하나를 셋이 씁니다.”
지안이 종이를 끌어다 숫자부터 봤다.
“집행액 합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4억 2,700만.”
지안은 마커를 눌러 열고 전지 왼쪽에 그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포스트잇 한 장을 떼서 그 옆에 붙였다.
“12월 18일 오후 3시 22분. 첫 배너 소재 업로드 시각이에요.”
“유라 밴은요.”
“한남동 주차장에 들어간 게 3시 9분.”
마커가 두 점을 이었다.
선 두 개가 벽 위에서 만났다.
시헌이 짧게 숨을 뱉었다.
“십삼 분.”
“차 안에서 나눈 얘기가 열세 분 뒤에 배너가 됐어요.”
지안은 다음 종이를 넘겼다.
“집행 결재 경로은요.”
시헌이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모서리에 올려두고 서류를 넘겼다.
“태건유통 기획조정 명의 법인카드. 사용자 등록명 조현우.”
“승인자.”
“비어 있습니다. 대신 12월 15일자 한도 상향 요청서에 결재 도장이 하나 찍혀 있어요. 상무.”
“이름은요.”
“직인만요. 이름 칸은 비었습니다.”
“그럼 됐어요.”
지안이 마커 뚜껑으로 종이를 톡 짚었다.
“이름을 안 쓰고 도장만 찍는 사람은, 자기가 찍는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시헌이 지안을 봤다.
“하나 더 있어요.”
지안이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그쪽으로 밀었다.
“배너 소재 원본 파일. 세 매체 중 제일 작은 데 막내 운영자가 어제 낮에 보내줬어요.”
시헌의 눈이 화면에 붙었다.
“이걸 어떻게.”
“열두 시 반에 그 회사 앞 김밥집에서 만났어요. 그 친구 이번 달에 그만둬요. 퇴직 정산이 두 달 밀렸대요.”
“...대표님.”
“파일 속성 열어보세요. 업로더 계정 도메인이 대행사 게 아니에요.”
시헌이 트랙패드를 몇 번 눌렀다.
멈췄다.
“태건유통 사내망입니다.”
“네.”
“이걸 왜 아까 안 꺼내셨습니까.”
지안은 마커를 내려놓았다.
“그게 문제예요, 지금.”
시헌이 서류에서 손을 뗐다.
지안은 책상 아래 서랍을 열었다.
검은 노트를 꺼내 링을 눌러 폈다.
뒤쪽 백지 다섯 장을 손끝으로 세더니, 그중 마지막 장을 젖혔다.
거기엔 유행도, 컬러도, 시즌 표도 없었다.
지명 세 줄. 숫자 한 줄. 사람 이름 두 개.
“이건 전생에 제가 안주인 자격으로 들어갔던 태건 본가 서재예요.”
시헌이 종이 위로 몸을 기울였다.
“2층 왼쪽, 붙박이 책장 뒤에 벽금고가 있어요. 2020년 12월에 감사팀이 한 번 헛다리를 짚고 갔고요.”
“실물은요.”
“그때 이미 옮겨졌어요. 판교 물류센터 3층 사무동 문서보관실, 캐비닛 12번.”
시헌이 눈을 들었다.
“계열사 여섯 곳 용역비 부풀리기. 3년치.”
지안이 숫자 한 줄을 짚었다.
“장부 밖 금액 217억.”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시헌은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종이 위 이름 두 개를 손끝으로 짚었다가, 짚은 자리에서 손을 뗐다.
“이걸 왜 지금 저한테 보여주시는지 물어도 됩니까.”
“지금까지는 안 보여줬으니까요.”
지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 패는 늘 반만 깠어요. 그게 안전하니까.”
“안전했죠.”
“반만 깐 패로 5억 6천 막았어요. 백화점 네 곳 빠질 때.”
지안은 전지 쪽을 봤다.
여섯 시라고 적힌 칸에 마커 자국이 두껍게 남아 있다.
“근데 지난주 새벽 여섯 시는 못 막았어요.”
시헌이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
노트 모서리를 눌렀고, 손끝이 지안의 손등에 스쳤다.
치우지 않았다.
지안도 빼지 않았다.
“서 대표님.”
“네.”
“이건 각서로 안 묶이는 정보입니다.”
“알아요.”
“제가 이걸 세온 법무팀에 넘기고 조용히 태건 지분을 흔들면, 대표님은 아무것도 못 하십니다. 각서 다섯 개 조항 어디에도 이 얘긴 없어요.”
“알아요.”
“아는데 펴셨네요.”
“네.”
지안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사람 앞에서 계산을 안 하는 게 처음이다.’
“그러니까 이번 건 계약이 아니라 그냥 믿는 거예요.”
말끝이 조금 걸렸다.
“처음이라 서툴러도 봐주세요.”
시헌이 짧게 웃었다.
손을 거두고 시계를 다시 찼다.
“제가 졌으니까 이번엔 제 값을 부르시죠. 예전에 그랬죠.”
“기억나요.”
“이번엔 제가 값을 안 부르겠습니다.”
시헌이 A4 여백에 두 줄을 적었다.
“파주 3터미널 화주 송장 열람권. 판교 센터 야간 문서 반출 기록. 사흘이면 뽑습니다.”
“세온 이름으로요?”
“제 이름으로요.”
지안은 그 두 줄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마지막 장이 아니라, 바로 앞 백지에.
“그럼 순서를 정해요.”
지안이 일어나 전지 앞에 섰다.
새 줄을 그었다.
“기자회견. 1월 8일 오전 열 시.”
“장소는 태건 본점 앞입니까.”
“아니요.”
지안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하면 사진이 남아요. 저 혼자 서 있는 사진.”
“그럼요.”
“세온몰 입점 브랜드 협의체 회의실. 참석 브랜드 열한 곳. 유민 대표 포함이에요.”
시헌이 팔짱을 끼고 벽을 봤다.
“열한 곳이면 그림이 다르죠.”
“저 하나 죽이면 끝나는 판이 아니라는 걸 먼저 보여줘야 해요.”
지안이 전지에 번호를 매겼다.
“첫째. 산업스파이 의혹 제보 사진의 스캔 시각. 12월 22일 새벽 3시 47분, 우리 사무실 복합기 기록. 노트 41장.”
“둘째.”
“그 시각에 우리 사무실 열쇠를 복사한 사람.”
마커가 두 번째 칸을 눌렀다.
“셋째. 4억 2,700만 원 집행선. 법인 세 개, 주소 하나, 카드 한 장.”
“넷째는요.”
지안은 네 번째 칸을 비워뒀다.
“안 꺼내요.”
“이유.”
“넷째는 태건이 부인할 때 꺼내는 카드예요.”
시헌이 마커를 받아 들었다.
넷째 칸에 점 하나만 찍었다.
“부인 안 하면요.”
“부인해요.”
지안이 팔짱을 풀었다.
“재혁은 거절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몰렸다는 것도 이해 못 해요. 회견 끝나고 두 시간 안에 반박문 뿌릴 거예요. ‘사실무근, 법적 대응.’ 그 문장 그대로.”
“...전생에도 그랬습니까.”
“그 문장으로 제 장례식 기사 밑에 댓글이 달렸어요.”
시헌이 마커 뚜껑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유난히 작게 났다.
“셋째까지 가면 조현우가 잘립니다.”
“네.”
“꼬리 자르고 끝낼 거예요, 태건은.”
“그러니까 넷째가 있는 거고요.”
지안은 전지 아래쪽에 날짜를 적었다.
1월 5일, 6일, 7일.
“5일까지 반출 기록. 6일에 브랜드 열한 곳 동의서. 7일 밤에 자료집 인쇄. 여덟 시간이면 돼요.”
“인쇄는 어디서 합니까. 여기 복합기는 못 씁니다.”
“세온 지하 인쇄실 빌려줘요.”
“빌려드릴게요. 대신.”
시헌이 지안 쪽을 봤다.
“저 대신이라고 했지만 조건은 없습니다. 그냥 습관이에요.”
지안이 처음으로 웃었다.
일주일 만이었다.
“고쳐요, 그 습관.”
“고치는 중입니다.”
새벽 세 시.
시헌의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진동했다.
시계 옆에서 짧게 두 번.
시헌이 화면을 열었다.
읽었다.
다시 읽었다.
지안은 마커를 든 채로 그를 봤다.
“차 대표님.”
대답이 없었다.
“차 대표님.”
시헌이 화면을 지안 쪽으로 돌려 보였다.
세온 물류 정보팀에서 올라온 조회 이력이었다.
판교 센터 야간 문서 반출 기록.
요청 일시, 어제 오후 다섯 시 열두 분.
요청자 사번 옆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조현우.
지안의 손에서 마커가 책상으로 떨어졌다.
“...어제 오후 다섯 시.”
“저보다 서른두 시간 빠릅니다.”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람 사유란은요.”
“’내부 정리’.”
지안은 전지 위 넷째 칸을 봤다.
방금 시헌이 찍어둔 점 하나.
‘저쪽도 캐비닛 12번을 보고 있다.’
아니다.
옮기려고 보는 거다.
“차 대표님, 판교 센터 야간 반출은 몇 시부터예요.”
“새벽 네 시요.”
지안이 코트를 집었다.
“사흘 아니에요.”
“예.”
“오늘이에요.”
지안은 검은 노트를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헌이 시계를 낚아채며 따라붙었다.
“차는 위에 있습니다. 판교까지 이 시간이면 삼십 분.”
“이십오 분으로 해주세요.”
문고리를 잡은 순간, 지안의 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울음 섞인 숨이었다.
“대표님.”
한유라였다.
“저 지금 판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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