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판이 커진다
15화. 다시 시작된 여섯 시의 기억
모니터 세 대가 동시에 새로고침됐다.
밤 열한 시 십 분.
왼쪽 화면 게시판 첫 줄, 가운데 화면 실시간 검색 목록, 오른쪽 화면 커뮤니티 인기글.
세 곳에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아뜰리에 안 대표, 경쟁사 내부 자료 사전 입수 의혹. 해외 브랜드 카피, 문란한 사생활.’
지안은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토씨까지 같았다. 조사 하나 틀리지 않았다.
전생의 그 겨울에도 문장은 이 순서였다. 의혹, 카피, 사생활.
게시글 아래에 사진 세 장이 박혀 있었다.
설명글은 ‘스파이 노트’.
첫 커뮤니티 조회 수 4,100. 두 번째 1,800. 세 번째는 십오 분 전에 올라와 아직 300이었다.
지안은 사진을 확대했다.
펼친 면 왼쪽 여백, 링 구멍이 여섯 개 다 찍혔다.
‘이건 사진이야. 스캔이 아니고.’
지안은 낮에 윤 기자에게 보낸 메일을 다시 열었다.
오후 한 시 오십 분 발신. 복합기 접속 기록, 12월 22일 03시 47분, 41장. 발신 계정 namkiwook. 사무실 열쇠 무단 복제 확인서.
첨부 마지막 파일이 윤 기자가 보내온 스캔 사진 석 장이었다.
지안은 두 화면을 나란히 띄웠다.
윤 기자 쪽 석 장은 구멍이 두 개였다.
위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자리. 나머지 자리는 찢겨 톱니로 남았다.
지안은 전화를 걸었다.
“윤 기자님. 지금 커뮤니티 도는 사진하고, 낮에 저한테 보내주신 사진, 출처가 달라요.”
“같은 노트로 보이는데요.”
“노트는 같아요. 손이 두 개예요.”
지안은 마우스로 구멍을 짚었다.
“커뮤니티 건은 펼쳐놓고 찍은 사진이에요. 구멍 여섯 개가 다 있어요. 기자님한테 간 건 낱장을 유리판에 눌러 스캔한 거고요. 구멍이 두 개밖에 안 남았어요. 그 낱장이 제 노트에서 빠져 있던 기간은 사흘이에요.”
“사흘요.”
“11월 셋째 주요. 그 사흘 동안 그 장에 손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은 넷이고, 그중 셋은 세온 법무팀 입회 아래 있었어요. 입회 기록은 서면으로 드릴 수 있어요.”
수화기 저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대표님, 저는 이거 안 씁니다.”
지안은 숨을 아주 조금 내려놨다.
“오후에 데스크에 접속 기록 올렸어요. 열쇠 복제까지 나온 자료를 근거로 기사 쓰면 우리가 공범이라고요.”
“감사합니다.”
“근데요.”
윤 기자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알려드릴 건 있어요. 내일 오전 여섯 시에 세 곳이 동시에 나갑니다. 데스크 이미 넘어갔대요.”
벽시계가 열두 시 사 분을 지났다.
“여섯 시요.”
“예. 여섯 시. 저희 쪽에서 확인해봤는데 세 곳 다 어제 저녁에 광고 띠 계약을 새로 땄어요. 12월 잔여분인데 단가가 좀 이상해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 안쪽에서 순서가 저절로 읽혔다.
D-1 06:00 매체 3곳 동시. 09:00 백화점 3곳. D+2 정산 잠금.
블랙박스 음성에서 들은 그 순서, 전생에 지안을 묻은 그 순서.
시간까지 같았다.
“대표님? 듣고 계세요?”
“…네.”
“그럼 여섯 시 전에 뭐라도 준비하셔야.”
지안은 수화기를 내려놨다.
프린터에서 시헌이 보내온 광고 집행선 1차 목록이 반쯤 걸린 채 나왔다.
그걸 뽑으려고 서류철을 집었다.
손이 종이를 놓쳤다.
A4 열댓 장이 발등을 스치고 흩어졌다.
지안은 주우려고 몸을 굽혔고, 무릎이 접혔다.
앉은 자리가 샘플 행어 아래였다. 코트 소매가 이마를 스쳤고, 옆으로 세워둔 원단 롤 세 개가 어깨를 받쳤다.
‘일어나. 여섯 시까지 다섯 시간 오십육 분.’
일어나지지 않았다.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렸는데 그것도 안 됐다.
책상 위에서 폰이 울렸다.
차시헌.
한 번, 두 번, 세 번 울리고 끊겼다.
열두 시 이십 분에 현관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돌아가다 걸렸다. 안쪽 걸쇠.
열쇠 복제 건이 나온 다음부터 지안은 밤에 안에서 걸쇠를 걸었다.
“대표님.”
문 너머 목소리였다.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 켜져 있고 신발 있는 거 다 보입니다. 반지하 창이 좋네요.”
“…가세요.”
“전화 세 번 안 받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은 안 돼요.”
“뭐가 안 돼요.”
지안은 원단 롤에 뒤통수를 붙였다.
“다리가 안 펴져요.”
문 너머가 조용해졌다.
“어디 다쳤습니까.”
“아니요.”
“그럼 됐고. 걸쇠 푸세요.”
“차 대표님.”
“기어서라도 오세요. 못 여시면 제가 문 뜯습니다. 세온 이름으로 견적서 끊어드릴게요.”
지안은 짧게 숨을 뱉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끌었다. 무릎이 파일 박스 모서리에 걸렸다.
걸쇠까지 두 걸음이 아주 멀었다.
손을 뻗어 고리를 밀어냈다.
문이 열렸다.
시헌은 들어와서 지안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코트를 벗어 바닥에 깔고, 지안 옆 원단 롤에 등을 대고 앉았다.
나란히 앉으니 눈높이가 같았다.
“숫자 말해봐요.”
지안은 그를 보지 않았다.
“지금 뭐가 제일 무서운지, 숫자로.”
“…여섯 시요.”
“여섯 시에 뭐가 옵니까.”
“기사요. 세 곳 동시에.”
“그다음은요.”
지안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아홉 시에 백화점 세 곳이 물건을 빼요. 이틀 뒤에 정산이 잠기고요.”
말해놓고 입을 다물었다.
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직 아무 데도 안 나온 얘긴데요.”
지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 이 기사로 한 번 죽어봤어요.
그 문장이 목 안쪽에서 뭉개졌다.
여섯 시에 기사가 나가고, 아홉 시에 백화점이 물건을 뺐고, 이틀 뒤에 정산이 잠겼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부고 기사에도 그 기자 이름이 얹혀 있었다.
지안은 그 말을 하려고 숨을 모았다가, 눈물이 먼저 났다.
시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손을 뻗어 지안의 손목을 잡았다.
손이 아니라 손목이었다.
그대로 자기 어깨 쪽으로 끌어당겼다.
“울어도 됩니다.”
“…안 울어요.”
“지금 우시는데요.”
“이건 그냥.”
“그냥이면 그냥인 걸로 하죠.”
지안의 어깨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저, 각서 왜 썼는지 아세요.”
지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브랜드 지키려고 쓴 거 아닙니다. 브랜드는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대표님이 넉 달에 한 번씩 만드는 걸 제가 봤고요.”
“…그럼 뭘 지키러 왔어요.”
“당신 전부요.”
“그런 건 계약서에 안 써요.”
“압니다. 그래서 각서에도 안 썼어요.”
지안은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이건 계약서에 안 쓰고 하는 말이에요.”
계약서 밖에서 받은 말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아홉 시요.”
시헌이 말했다.
“네?”
“백화점 세 곳. 그거 어떻게 아셨는지, 오늘은 안 물어봐요.”
“…”
“근데 못 본 걸로 한 거, 못 들은 걸로 한 거, 다 유효기간 있습니다. 언젠가 대표님이 먼저 말해주기로 했으니까.”
“기한이 언젠데요.”
“제가 정하면 협박이고, 대표님이 정하면 약속이죠.”
지안은 눈가를 다시 한번 눌렀다.
두 번째에는 손이 덜 떨렸다.
“새벽 한 시요.”
“예?”
“광고 집행선. 지금 돌리죠.”
시헌이 웃었다.
“코트는 도로 입어야겠네요. 여기 춥습니다.”
새벽 한 시.
시헌이 노트북을 책상에 얹고 화면을 지안 쪽으로 돌렸다.
“매체 세 곳. 12월 띠 예산이 전부 같은 대행사를 거쳤습니다.”
“대행사 발주처요.”
“태건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법인 두 곳입니다. 자본금 오천만 원. 설립 8월, 9월.”
지안은 화면을 끌어당겼다.
“이 두 곳이요.”
시헌이 다른 창을 열었다.
“태건로지스 하도급 명단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3차 공급업체로요. 세온이 태건로지스랑 물류 물려 있어서, 공급업체 등록서류 사본이 우리 구매팀에 남아 있어요.”
“주소.”
“같아요. 지하 1층 호수까지.”
“대표 도장은요.”
“그것도 같습니다.”
시헌이 창 두 개를 나란히 띄웠다.
“왼쪽이 8월 법인 공급업체 등록서, 오른쪽이 9월 법인 대행 발주계약서. 인주 번진 자리랑 테두리 깨진 위치가 겹칩니다. 같은 도장, 각도만 다르게 찍었네요.”
지안은 볼펜을 들었다.
노트를 펼치고 두 법인 이름과 사업자 번호를 적었다. 아래에 화살표를 그리고 대행사, 그 아래 매체 세 곳.
글씨는 똑바로 적혔다.
“여섯 시 기사, 못 막아요.”
지안이 말했다.
“막을 생각 없어요. 어차피 세 곳이 아니라 세 줄이에요. 의혹, 카피, 사생활. 카피는 이미 폐기증명 나왔고, 사생활은 물적 증거가 없어요.”
“남은 건요.”
“의혹. 노트.”
지안은 커뮤니티 사진을 다시 띄웠다.
“이 세 장, 유라가 찍은 거예요.”
“확실합니까.”
“이 페이지, 제가 놔둔 거예요.”
시헌의 눈이 잠깐 좁아졌다.
“내용이요?”
“2월 물류대란 날짜를 이 주 뒤로 고쳐 적어둔 장이에요. 유라가 그 방에 들어갈 이 주 동안 펼쳐놨어요.”
“그럼 저 사진은.”
“틀린 정보예요. 2월에 아무 일도 안 나면 저 사진은 스파이 증거가 아니라 낙서예요.”
시헌이 낮게 웃었다.
“그걸 2월까지 기다린다는 소리네요.”
“두 달이요. 두 달치 매출은 태워요.”
지안은 볼펜 뒤로 구멍 두 개짜리 스캔을 짚었다.
“문제는 이쪽이에요. 이건 진짜예요. 41장 다 진짜고, 그 안에 앞으로 일어날 일이 다 적혀 있어요.”
“41장 전부 남기욱에게 갔고요.”
“네.”
지안은 노트를 덮고 그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차 대표님. 세온 법무팀, 지금 연락되나요.”
“당직 있습니다.”
“41장 전부, 여섯 시 전에 작성 시점을 못 박아야 해요.”
“방법요.”
“전 장 스캔해서 파일 해시값 뽑고, 시점 확인 서비스에 등록해요. 원본 노트는 봉인 봉투에 넣고 봉인선에 제 서명, 입회인 서명. 공증 사무소는 아홉 시에 여니까 그전까진 이걸로 버텨요.”
“이유 물어봐도 됩니까.”
“기사가 ‘경쟁사 자료를 훔쳤다’로 나가면, 저는 ‘남의 자료가 아니라 내가 3월에 쓴 글이다’를 증명해야 하니까요. 3월 필적, 3월 볼펜, 3월 종이. 그 날짜가 남의 회사 자료 만들어진 날보다 앞이면 기사 세 줄 중 첫 줄이 죽어요.”
시헌이 폰을 들었다.
“박 대리. 파주 아니고 성수 사무실요. 봉인봉투 다섯 장, 입회확인서 서식, 사내 시점확인 계정 권한. 삼십 분.”
전화 저편에서 뭐라고 물었다.
“아뇨, 내부 문건 아니고 외부 대표님 원본입니다. 세온이 입회만 서요. 내용은 안 봅니다. 그것도 확인서에 넣어요.”
전화를 끊고 그가 지안을 봤다.
“방금 이십 분 전에 원단 롤에 기대 있던 사람 맞습니까.”
“바닥에 앉아 있어도 여섯 시는 오니까요.”
한 시 삼십오 분, 박 대리가 문을 두드렸다.
패딩 위에 사원증을 걸고, 겨드랑이에 서류철을 낀 채였다.
“차 대표님, 저 오늘 당직이지 야근 아닙니다.”
“수당 두 배.”
“세 배요.”
“두 배 반.”
박 대리가 봉인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안지안 대표님이시죠. 절차부터 말씀드릴게요. 저는 내용 안 봅니다. 장수랑 겉면만 확인하고, 스캔은 대표님이 직접 하세요. 제가 옆에서 시간만 셉니다.”
“그게 더 좋아요.”
지안이 복합기 덮개를 열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박 대리가 스캔 카운터를 소리 내 읽었다.
“열두 장. 스물다섯 장. 서른일곱 장.”
“마흔한 장.”
지안이 마지막 장을 뒤집었다.
복합기 접속 기록에 새 줄이 찍혔다. 12월 24일 01시 52분, 41장, 발신 계정 anjian.
“같은 41장인데요.”
박 대리가 화면을 보고 말했다.
“22일 03시 47분에도 41장이 나갔네요. 계정만 다르고.”
“그게 유출본이에요.”
“그럼 이건 원본이고요. 두 접속 기록 차이가 그대로 증거네.”
시헌이 노트북에서 해시값을 뽑아 읽었다.
지안이 노트 겉면에 사인펜으로 날짜를 적고, 봉인봉투에 밀어 넣었다.
접합부에 서명했다. 안지안.
박 대리가 그 아래 줄에 이름을 적고 사번을 적었다.
시헌이 마지막 줄에 서명했다.
“차시헌. 시각 새벽 두 시 일 분.”
“입회확인서 세 부요.”
박 대리가 서식을 밀었다.
“대표님 보관, 세온 보관, 아홉 시에 공증 사무소 제출용.”
지안은 세 장에 차례로 이름을 적었다.
세 번째 서명에서 손끝이 한 번 멎었다가, 곧 이어졌다.
봉인된 노트가 책상 가운데 놓였다.
전생에는 이 노트가 부검대 위 유서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봉인선에 세 사람 이름이 얹혔다.
‘여섯 시까지 세 시간 오십구 분.’
한 시 사십 분, 지안의 폰이 짧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 사진 한 장.
호텔 라운지, 유라, 마주 앉은 남자의 어깨와 손목.
지안은 확대했다.
이미 아는 시계였다. 문제는 각도였다.
“…일곱 번째예요.”
“뭐가요.”
“명 실장한테서 받은 인화본이 여섯 장이었어요. USB 원본 메타 19장, 그중 라운지 컷은 여섯 개. 이건 오른쪽에서 찍혔어요. 여섯 장에 없는 자리예요.”
시헌이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3자 제공 안 했다고 사인했죠, 그 사람.”
“위약금 3억이요. 아침에 청구할 거예요.”
“그건 문제가 아니라 보너스고요.”
“네.”
지안은 사진 아래 문장을 읽었다.
‘여섯 시 전에 전화하세요.’
손끝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차 대표님.”
“예.”
“여섯 시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에요.”
시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데스크. 대행사. 발주처.”
“그리고 이 방에 열쇠 복사해서 들어온 사람.”
지안은 폰을 뒤집어 책상에 놓았다.
“명 실장 문장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협박할 때 금액부터 불러요. 이건 시간부터 불렀어요.”
박 대리가 패딩 지퍼를 올리다 멈췄다.
“저, 이건 확인서에 안 들어가는 얘기죠?”
“들어가면 좋겠는데요.”
시헌이 말했다.
“번호 저장해두세요, 박 대리. 아침에 통신 쪽 문의할 겁니다.”
“제가 걸어볼까요.”
시헌이 지안을 봤다.
“아니요.”
지안은 봉인 봉투를 서류철 안쪽에 밀어 넣고 잠금 손잡이를 돌렸다.
“제가 걸어요. 다섯 시 오십구 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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