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판이 커진다
14화. 덫은 문을 잠그는 게 아니다
“대표님, 이거 제가 다시 써야 하나요.”
오 팀장이 운행기록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물었다.
12월 셋째 주 월요일, 아침 아홉 시.
반지하 사무실 계단 위로 얼어붙은 흙물이 얇게 깔려 있었다.
지안은 기록부를 받아 지난주 세 장을 넘겨봤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출발 시각 숫자 위에 볼펜을 눌러 덮어쓴 자리가 세 번 있었다.
밑에 깔린 숫자는 14시 10분, 위에 얹은 숫자는 16시 40분.
“손으로 고친 데가 세 군데예요.”
“아, 그건 제가 계산을 잘못해서…”
“됐어요. 커피 뭐 드세요.”
오 팀장이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지안은 자판기가 아니라 길 건너 카페로 올라가 라떼 두 잔을 샀다.
큰 사이즈로.
“오 팀장님. 다음 주 수요일 오후 두 시부터 네 시, 유라 씨 스케줄 비워요.”
“…비워요?”
“미용실도 잡지 말고요. 그날은 차로 데리러 가기만 하고 팀장님은 촬영장에서 대기해요.”
컵을 받는 오 팀장의 손이 미끄러졌다.
뚜껑 틈으로 거품이 밀려 나와 손등을 적셨다.
지안은 티슈를 건네주고 사무실로 내려왔다.
검은 노트를 펼쳐 12월 마지막 주 칸에 한 줄을 썼다.
덫은 문을 잠그는 게 아니다. 열어두는 거다.
그날 저녁 촬영장에서 유라는 유난히 상냥했다.
립밤을 바르다 말고 지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표님, 저 요즘 진짜 열심히 하잖아요.”
카메라 앞에서 쓰는 목소리였다.
“저 믿어주시는 거죠?”
“믿어요.”
지안은 무릎에 얹어둔 서류철을 조용히 덮었다.
표지 아래 첫 장에 제17조가 인쇄돼 있었다.
그 주부터 지안은 하나씩 풀었다.
법인 차량에 걸어둔 운행 알림 문자를 해제했다.
유라의 위치 공유 앱을 지안 계정에서 지웠다.
회사 지급 휴대폰 반납 시각을 저녁 여덟 시에서 밤 열한 시로 늦췄다.
“진짜 다 푸시는 거예요?”
세온 법무팀 강 대리가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였다.
“대신 계약상 회사가 보관 권한 가진 것만 남겨요.”
지안은 항목을 셋만 짚었다.
“차량 블랙박스 음성 30일치. 법인카드 승인 내역. 일일 활동보고서.”
“활동보고서는 본인이 직접 쓰는 거잖아요. 거짓말로 채우면요?”
“거짓말이 더 좋아요. 대조할 게 생기니까.”
강 대리가 잠깐 웃었다.
“이렇게까지 열어두면 진짜 물어요?”
“물 거예요.”
지안은 프린터에서 나온 보관 권한 확인서를 두 장으로 나눴다.
“저 사람은 사다리가 보이면 계약서를 안 읽거든요.”
이 주 동안 법인카드 승인 내역이 조용히 바뀌었다.
주유 위치가 성수에서 한남으로 두 번 옮겨갔다.
편의점 결제가 오후 두 시대에 잡혔다.
담배 한 갑과 생수 두 병.
유라는 담배를 안 피웠다.
지안은 그 줄을 형광펜으로 칠하지 않았다.
숫자만 옮겨 적고 덮었다.
12월 27일 수요일.
오후 두 시 십사 분, 법인 차량은 성수동 촬영장이 아니라 한남동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 램프를 내려갔다.
블랙박스 음성 파일은 이십육 분짜리로 남았다.
지안은 그 파일을 밤 열한 시가 넘어서 열었다.
이어폰 한쪽만 꽂았다.
첫 번째는 웃으면서 들었다.
두 번째는 종이에 숫자를 적으면서 들었다.
접촉 횟수 6회. 제17조 회차별 3억. 청구액 18억.
세 번째에서 손끝이 차가워졌다.
18분 42초.
“그 여자는 숫자로 안 무너져.”
재혁의 목소리는 낮고 느긋했다.
우아한 척할 때 늘 그랬다.
“숫자로 붙으면 우리가 지는 판이야. 그때 그 방법으로 가야지.”
지안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귀가 울렸다.
‘그때.’
전생의 겨울이 순서대로 되살아났다.
새벽 여섯 시, 세 매체에 카피 의혹 기사가 동시에 떴다.
오전 아홉 시, 백화점 세 곳에서 전화가 왔다.
정오에 커뮤니티에 사생활 얘기가 붙었다.
이틀 뒤 거래처가 정산을 잠갔다.
닷새 뒤 지안은 기자회견장 대신 병원 응급실에 있었다.
지안은 노트를 펼쳐 그 순서를 날짜까지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D-1 새벽 06:00 / 매체 3곳 동시.
D-1 09:00 / 백화점 3곳.
D+2 / 정산 잠금.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유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메라 밖에서만 쓰는 반말이었다.
“저 사진 있어요. 그 노트, 필기까지 다 찍었어요.”
“몇 장.”
“세 장이요. 근데 더 찍을 수 있어요. 저 그 방 들어가도 아무도 안 봐요.”
잠깐 정적.
“저도 살아야죠. 저 이렇게 된 거 다 저 여자 때문이잖아요.”
지안은 파일을 세 번째로 멈췄다.
이번엔 웃지 않았다.
새벽 두 시, 계단에 발소리가 났다.
시헌이 파주에서 바로 올라온 차림으로 내려왔다.
어깨에 눈이 아니라 물기가 앉아 있었다.
지안은 헤드폰 한쪽을 빼서 말없이 내밀었다.
시헌은 선 채로 다 들었다.
중간에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다 듣고 헤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면서 낮게 웃었다.
“이걸 왜 오늘 잡지 않고 이 주나 흘려두셨는지 알겠네요.”
“알겠어요?”
“한 번이면 실수고, 여섯 번이면 고의니까요.”
“여섯 번째까지 세고 있었어요.”
지안은 숫자를 적어둔 종이를 돌려 보였다.
“위약금은 회차별로 발생하거든요. 지금 청구액 18억. 유라 씨 전 재산 긁어도 2억 안 돼요. 나머지는 향후 수입에 걸리죠.”
“돈 받으려고 세신 건 아니잖습니까.”
“받을 생각도 있어요. 근데 지금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순서예요.”
지안은 노트를 시헌 쪽으로 돌렸다.
새벽 여섯 시. 아홉 시. 정오.
“이게 뭡니까.”
“저쪽이 쓸 매뉴얼이에요.”
“어떻게 아십니까.”
“…이미 한 번 읽어봤어요.”
시헌은 노트를 오 초쯤 봤다.
더 묻지 않았다.
“매체 세 곳, 짚어주시면 제가 오늘부터 광고 집행선을 봅니다. 어느 대행사 통해서 태건 돈이 들어가는지 나옵니다.”
“48시간 안에요.”
“각서 4항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안은 그때 시헌의 손목을 봤다.
형광등 아래에서 다이얼 아래 작은 창이 반짝였다.
오 초쯤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말은 안 했다.
시헌이 알아챘다.
버클을 풀어 시계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2019년 12월, 사내 임원 기념품이에요.”
“…”
“마흔한 개 나갔습니다. 수령자 명단 받아왔어요.”
안주머니에서 A4 한 장을 꺼내 밀었다.
지안은 이름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세온 계열 임원, 자회사 대표, 사외이사.
태건 사람은 없었다.
“명단에 없는 사람이 중고로 살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시리얼도 적혀 있습니다. 열네 번째 줄이 제 거예요.”
시헌이 어깨를 조금 낮췄다.
“그래도 못 믿으시면 제 것도 증거로 맡기죠.”
지안은 시계를 손가락 두 개로 밀어 돌려줬다.
“안 맡아요. 필요하면 명단만 쓸게요.”
밀어 돌려주는 손끝이 시헌의 손등에 닿았다.
차가운 쪽은 지안이었다.
늘 하던 대로 손을 빼야 하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처음으로 먼저 피하지 않았다.
이 초. 삼 초.
시헌이 시계를 집으며 조용히 말했다.
“손 차네요, 대표님.”
“난방 껐어요. 전기료 아까워서.”
“켜세요. 제가 내죠.”
“조항 없는 지출은 안 받아요.”
“그럼 조항 만들죠. 제20조, 난방.”
지안이 웃었다.
웃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이런 밤에 웃네, 내가.’
새벽 다섯 시, 지안은 녹취를 세 부로 나눴다.
사무실 하드, 세온 법무팀 보관, 그리고 공증사무소 예약 건.
원본 생성 시각과 암호화 데이터 값을 확인서에 적었다.
그다음에 유라의 다음 촬영 촬영 일정표를 열었다.
집합 시각을 두 시간 늦췄다.
메이크업 대기 30분 추가.
간식 항목에 유라가 좋아하는 브랜드 커피를 넣었다.
강 대리가 옆에서 화면을 봤다.
“…지금 잘해주는 거예요?”
“미끼는 아직 회수할 때가 아니에요.”
“저 사람이 눈치채면요?”
“눈치 못 채요. 자기가 잘해서 대접받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지안은 촬영 일정표를 전송하고 의자에 등을 붙였다.
여섯 시가 지났다.
전생의 그 시각이 지나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지안은 그제야 숨을 한 번 길게 뱉었다.
여섯 시 사십 분, 메일 알림이 떴다.
패션 전문지 윤 기자.
제목 한 줄에 눈이 먼저 걸렸다.
‘아뜰리에 안 관련 확인 요청.’
지안은 본문을 소리 없이 읽었다.
대표님, 이른 시간 죄송합니다.
‘경쟁사 내부 자료 사전 입수’ 관련 제보를 받았습니다.
오늘 오후 두 시 마감 전까지 입장 부탁드립니다.
첨부: 노트 사진 3장.
지안은 첨부를 열었다.
첫 장, 11월 3주 카멜. 두 번째 장, 12월 1주 숏패딩.
각도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했다. 서서 찍은 사진.
세 번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노트가 아니었다.
복사본이었다.
링 구멍 자리가 회색으로 뭉개져 있고, 종이 왼쪽 아래에 스캔 특유의 검은 띠가 얇게 깔렸다.
유라가 찍을 수 있는 건 노트지, 복사본이 아니다.
지안은 사무실 복합기로 걸어갔다.
전원을 켜고 사용 이력 메뉴를 눌렀다.
12월 22일 03시 47분. 스캔 41장. 메일 전송 1건.
그날 새벽 세 시 사십칠 분에 이 사무실에 있던 사람은 지안 혼자였다.
책상에서 노트를 베고 자고 있었다.
지안은 전송 이력의 주소를 눌러 끝까지 펼쳤다.
인터넷 주소가 태건도, 세온도, 윤 기자의 매체도 아니었다.
앞자리 이름을 읽는 순간 목 안쪽이 말랐다.
namkiwook.
전생의 그 겨울, 새벽 여섯 시에 첫 기사를 올린 기자.
지안의 부고에도 이름을 얹었던 사람.
지안은 그 주소를 노트 마지막 장에 적었다.
볼펜을 놓고, 아직 계단에 남아 있던 시헌을 불렀다.
“차 대표님.”
시헌이 돌아섰다.
“명단, 하나 더 받아와 주세요.”
“어디 명단입니까.”
“이 사무실 열쇠 복사해 간 사람이요.”
말하면서 지안은 창을 봤다.
셔터 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얇게 누웠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 주 동안 지안이 열어둔 건 유라 쪽 문 하나였는데, 물고기가 두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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