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13화 / 전 21화0

3부. 판이 커진다

13화. 유통도 만든다

서지안


“셔터, 거기서 멈춰요.”

지안의 손가락이 무릎 높이에서 딱 섰다.

세온몰 행사팀 윤 대리가 체인을 잡은 손을 놓았다.

반쯤 올라간 셔터 밑으로 새벽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폐공장을 뜯어고친 1층 매장, 바닥은 아직 시멘트 그대로였다.

“왜 다 안 올립니까. 어차피 세 시간 뒤 오픈인데요.”

“반만 보이는 게 더 궁금하니까요. 지금 몇 명이에요?”

윤 대리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여섯 시 정각 기준 사백열두 명. 첫 팀은 어제 밤 열한 시부터 앉아 있습니다.”

“아홉 시까지 팔백 넘겨요. 대기 번호표 천 장 준비했죠?”

“천이백 장 뽑았습니다.”

지안은 태블릿 숫자를 보지 않고 창밖을 봤다.

도로 하나 건너, 태건백화점 본점 정문.

그 위 2층 유리에 새벽 청소등이 켜져 있었다.

전생에 저 층 입점 심사에서 세 번 떨어졌다.

네 번째에는 조현우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다섯 번째에는 재혁의 이름을 빌렸다.

‘그때 저 유리 안쪽에서 나를 내려다봤지.’

지금은 저 유리가 관중석이었다.

“대리님. 도쿄 세이류, 파리 르 카드르, 상하이 편집숍 두 곳.”

“…네?”

“내년 3월이면 그 넷이 다 임시 매장으로 뒤집혀요. 정규 매장 대신 2주 단위 임시 매장으로 브랜드를 돌리는 구조로요. 그 흐름이 국내로 넘어오는 건 여름.”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러니까 올해 겨울에 미리 우리 이름을 걸어두는 거예요. 남들이 임시 매장이 뭔지 검색할 때 우린 세 번째 임시 매장을 열고 있어야 하고요.”

윤 대리가 태블릿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솔직히 여쭙겠습니다. 백화점 없이도 되겠습니까. 저희 쪽 임원들도 그거 물어요.”

지안은 노트를 덮었다.

“유행은 예측하는 게 아니야. 내가 먼저 만드는 거지.”

“…예?”

“유통도 똑같아요. 채널도 만들면 돼요.”

여덟 시 사십 분, 줄은 팔백사십 명을 넘겼다.

아홉 시 정각에 셔터가 끝까지 올라갔다.

카멜 숏패딩이 여덟 분 만에 천이백 장 빠졌다.

“대표님, 카멜 재고 없어요. 창고 물량 당깁니까?”

“당기지 마요. 오늘 카멜은 여기서 끝. 대신 번호표 받은 손님 전원한테 2월 사전 예약 링크 뿌려요.”

“품절 내는 게 이득입니까?”

“품절이 광고예요. 광고비 0원.”

엽서 줄이 문제였다.

유라의 ‘첫눈 오는 날의 그 사람’ 화보 엽서 다섯 종.

다섯 장을 다 모으려고 줄을 다시 서는 사람들이 인도를 넘어 백화점 회전문 앞까지 늘어졌다.

열한 시 십 분, 태건 보안팀 조끼 세 명이 건너왔다.

“사장님, 여기 저희 고객 동선입니다. 줄 정리 좀 해주셔야겠는데요.”

“어느 구간이 동선이죠?”

“회전문 앞 전부요.”

지안은 파일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도로 점용 허가증 사본. 구청 교통행정과, 이번 주말 삼 일 치예요. 대기열 펜스 구간 표시 여기 있고요.”

보안팀장이 종이를 받았다.

“그리고 이건 세온 물류 상시 하차 신고서. 하차 구역이 회전문 쪽이 아니라 후면입니다. 저희 차는 그쪽 골목만 씁니다.”

“…그럼 이 줄은요.”

“줄은 사람이지 짐이 아니에요. 사람 서 있는 걸 백화점이 치우라 마라 할 권한은 없죠. 불편하시면 구청에 민원 넣으세요. 접수번호 나오면 저희도 그거 보고 조정할게요.”

팀장의 무전기가 지직 울렸다.

지안은 한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팀장님, 하나만요. 저 줄 사진 지금 찍어서 위에 올리실 거잖아요.”

“…아, 그건.”

“찍으세요. 화질 좋게요. 그거 오늘 제 자료로도 쓸 거예요.”

세 사람이 돌아갔다.

윤 대리가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대표님, 저 사람들 진짜 사진 찍었습니다.”

“찍어야 오죠.”

밴 스피커에서 유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표님, 저 왜 안 내려요? 지금 밖에 제 엽서 줄이 저만큼인데, 얼굴 한 번 비추면 기사 열 개는 나오잖아요.”

“오늘 노출 없어요. 유라 씨 이미지는 붐비는 데 안 서요.”

“저 오늘도 차에서만 다섯 시간째예요. 나는 맨날 이렇게 갇혀만.”

“삼십 분 뒤 스튜디오 이동. 4월 화보 가봉 있어요. 끊을게요.”

지안은 통화를 끊고 시계를 봤다.

오후 두 시 사 분.

‘올 시간이네.’

재혁은 코트도 걸치지 않고 길을 건너왔다.

셔츠 소매가 바람에 부풀었고, 뒤에 조현우가 반걸음 처져 따라왔다.

임시 매장 안쪽 계산대까지 곧장 들어와서 지안 앞에 섰다.

“서 대표. 이런 노점 장사로 뭘 증명하려고.”

“노점이요?”

“바닥이 시멘트인데 매장이라고 부르긴 좀.”

지안은 계산대 모니터를 돌렸다.

각도를 재혁의 눈높이에 맞췄다.

“두 시 정각 마감 집계예요. 오늘 일 매출 4억 7,200만. 수수료 12%, 정산 15일.”

재혁의 시선이 숫자에 붙었다.

“상무님 백화점은 수수료 32%, 정산 60일. 반품 100% 우리 책임에 인테리어 분담금 별도였죠.”

“…그건 협회 표준.”

“같은 상품으로 저는 20% 더 남기고, 돈은 사십오 일 먼저 받아요. 이게 노점이면, 저 2층은 뭐예요?”

조현우가 재혁의 팔꿈치 쪽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재혁의 턱이 한 번 움직였다.

“백화점 빼는 건 시작일 뿐이야. 플랫폼도, 결제도, 다.”

존댓말이 벗겨졌다.

“저번 문자보다 낫네요. 반지하랑 폭설 얘기보다는 구체적이라서요.”

“서지안.”

“이름 부르실 거면 마이크 없는 데서 하시고요.”

재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너 요즘 무슨 노트를 쓴다더라. 미래 유행이 다 적혀 있다고.”

지안의 손끝이 계산대 모서리에서 잠깐 멈췄다.

‘왔다. 그 사진.’

숨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업무 수첩이요. 상무님도 하나 쓰세요. 수수료 구조라도 적어두시면 접수처에서 그렇게 안 당하셨을 텐데.”

“오래 못 간다, 너 이거.”

“오래 갈 필요 없어요. 3월엔 파리에 있을 거니까.”

재혁이 몸을 돌렸다.

회전문까지 걸어가는 그의 등 뒤로 엽서 줄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었다.

저녁 여덟 시.

셔터가 내려가고 남은 건 세 장의 종이였다.

마감 정산서 6억 1,900만 원.

도쿄 세이류 구매 담당자의 의향서 한 장, 내년 2월 사전 입고 물량과 임시 매장 두 주.

그리고 윤 대리가 받아 적은 메모.

“대표님, 오늘 전화 세 통 왔습니다. 태건 본점 2층 입점 브랜드 두 곳, 잠실 한 곳. 철수 조건 문의요.”

“뭐라고 했어요?”

“세온몰 수수료 12%, 정산 15일. 조건표 보내드리겠다고요.”

“잘했어요. 대신 조건표에 한 줄 넣어요. 태건과 계약 해지 위약금 발생분은 첫 분기 정산에서 분할 차감 가능.”

윤 대리가 펜을 멈췄다.

“그건 저희 손해입니다.”

“이번 주말에 세 곳이 나오면 다음 달엔 열 곳이 물어요. 2층이 비면 그 유리가 뭘로 보이는지 아세요?”

“…뭘로 보입니까.”

“거울이요. 저쪽이 자기 얼굴을 봐야죠.”

밤 열한 시, 임시 매장 건물 옥상.

난간 아래로 백화점 간판 조명이 반쯤 꺼져 있었다.

시헌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철문을 밀고 올라왔다.

“올라오지 마시라니까요. 오늘 대표님 회의 세 개 밀렸다고 들었는데요.”

“밀린 건 제 일이고, 이건 제 취미입니다.”

컵 하나가 지안 손에 들어왔다.

미지근했다.

“오늘 하루로 태건 봉쇄 손실 5억 6천, 다 회수하셨습니다. 제가 계산해봤어요.”

“계산은 제 일인데요.”

“저는 대표님 계산이 맞는 걸 확인하는 일을 하죠.”

“그거 확인해서 뭐가 남아요.”

“제 지분 가치요.”

지안이 웃었다가, 웃음이 길어지기 전에 컵을 입에 댔다.

“세온몰 12%는 두 분기만 버티세요. 브랜드 열 곳 붙으면 그 숫자가 시장 기준이 돼요. 그때 태건은 32%를 못 부릅니다.”

“그 뒤엔요.”

“뒤는 2월이에요. 항만 파업. 세이류 사전 입고 물량이 그 앞에 걸리면 안 되니까 1월 셋째 주에 통으로 밀어야 해요.”

“또 그 수첩 얘기군요.”

“권재혁도 오늘 그 소리 했어요.”

시헌의 눈이 한 번 굳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미래 유행이 다 적힌 노트를 쓴다더라, 라고요. 유라 씨가 찍은 사진이 조현우한테 갔고, 조현우가 상무한테 보고했고. 순서는 그거예요.”

“48시간 안에 유출 경로 잡습니다. 각서 3조.”

“그건 내일 오전에 하고요.”

바람이 옆에서 밀려왔다.

지안의 머리카락이 날려서 시헌의 코트 소매 단에 걸렸다.

그가 손을 들었다.

머리카락을 떼어내려던 손이 소매 위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입김이 서로의 얼굴 앞에서 하나로 섞였다.

거리가, 숨 쉬는 폭만큼 남았다.

지안은 종이컵을 내려다봤다.

컵 안에서 커피 표면이 떨렸다.

‘조항이 없다.’

이 거리를 규정하는 조항이 하나도 없었다.

반걸음 물러섰다.

“각서 3조, 정보 공유 48시간. 내일 오전에 자료 보내드릴게요.”

시헌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네.”

“열 시 전에 보낼게요.”

“열 시요.”

지안은 컵을 난간에 놓고 철문으로 걸었다.

계단 첫 칸을 내려서면서 스스로에게만 반말로 말했다.

‘감정 앞에서 처음으로 도망친 사람이 나라니.’

여섯 배 위약금도, 서른두 퍼센트 수수료도, 3억 폐기도 다 정면으로 받았다.

그런데 소매에 걸린 머리카락 하나에서 물러섰다.

두 칸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대표님.”

위에서 시헌이 불렀다.

“오늘 첫 줄 서신 분, 밤 열한 시부터 앉아 있었다던 그 손님이요.”

“네.”

“3년 전 박람회에도 계셨습니다. 대표님 부스 앞에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옥상에 얇게 남았다.

시헌은 난간에 팔을 걸었다.

길 건너 2층 유리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접힌 자리가 하얗게 닳은 사진 한 장.

부스 앞에 쭈그려 앉아 견본 원피스 단을 손가락으로 재고 있는 여자.

머리는 대충 묶었고, 무릎 위에 자기가 쓴 사업계획서를 받쳐놓았다.

시헌은 사진을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적힌 날짜.

창업 박람회보다 넉 달 앞선 날이었다.

그는 사진을 다시 접어 넣고, 지안이 놓고 간 종이컵을 집었다.

“두 달이라고 하셨죠, 대표님.”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비웠다.

“그 전에 제가 먼저 말할 겁니다. 저 사진 찍은 날부터 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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